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현대인들에게 사랑에 대해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사랑이 자연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랑은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기술(art)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본다. 얼마나 많은 시와 노래, 문학과 예술이 이런 낭만적인 사랑을 지극히 고귀한 사랑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가?

낭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현대인들은 감정에 충실한 사랑이야말로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이라고 미화시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보다 '사랑에 빠진다'는 말을 더 강하고 고결한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여기지 않는가? 그렇지만 사람의 감정은 너무나 쉽게 변화한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하면서도 사랑이 금방 식어버리는 경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관심, 책임, 존경, 지식의 네 가지를 사랑의 기본적인 요소라고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화분에 물 주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에 대한 깊은 관심을 한 순간도 놓지 않는다.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책임이 또한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의 모든 문제에 대해 부모로서의 책임을 진다. 부부에게는 사랑하는 배우자의 모든 문제에 대해 배우자로서의 책임이 있다. 자기 가족의 문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조국과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조국과 인류의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감상적인 애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관심과 책임감만으로는 사랑이 왜곡될 위험성이 있다. 지나친 관심과 책임감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자기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기 쉽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조차도 이렇게 왜곡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의 삶은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소유하거나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부모는 사춘기 자녀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하고, 부부는 상대방의 특성과 필요를 잘 알아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 대한 지식, 교육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하기 위해서는 치료의 기술, 곧 의술을 배워야 한다. 훌륭한 의사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의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의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기술은 훌륭한 의사나 예술가의 능력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 그 능력을 키워가야 하는 삶의 기술인 것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