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는 1919년 2월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으로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언론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로서 민족의 애국 계몽운동가로 존경을 받던 분이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석방된 후 춘원 이광수는 친일 성향으로 전향해 일제 말기 창씨개명, 내선일체, 징용과 징병 등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1945년 해방 후 그는 민족의 반역자로 지탄을 받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그는 일제시대 자신의 민족운동과 친일활동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나의 고백'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까지도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해서라도 민족 보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한다.

나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는 춘원 선생의 고백이 그의 진심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일제 말기 그의 선택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선택이었기에, 민족의 지도자로서 너무나 큰 역사적인 과오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통해 언론에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제국을 위해 자원해 참전하라!"고 호소한다.

춘원 선생은 나의 고백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당시의 상황을 다각도로 판단해 선택한 행동이었다고 설명한다. "일본이 승전한다면 우리는 일본인과 동등한 평등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이 패전한다 해도 식민지 상태인 조선이 일본에 협력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1940년대 일본제국의 식민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제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죽었거나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해외로 망명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반도에서 일본의 정책을 거부하고 산 사람이 없으니 모든 국민이 친일 협력자인 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서 군중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인용해 이전의 친일 행위를 용납하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친일 행적에 대한 참회의 고백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오히려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고 변호함으로써, 춘원은 또 한 번의 역사적인 과오를 범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본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갈수록 군국주의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조선에는 경찰도 없고 군대도 없으며, 임시정부 지도자들마저 뿔뿌리 흩어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극심한 고문으로 병약할 대로 병약해진 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도산 선생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도산 선생은 1938년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병상에서 "목인아, 목인아, 네가 우리 민족에게 큰 죄를 지었구나!" 일본 천황을 크게 꾸짖었다고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등 일제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선택이지만,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이처럼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조국의 해방에 대한 믿음을 지킨 분들이 있었기에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조국의 독립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그 부끄러운 선택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된 것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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