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상록수'를 쓴 작가 심훈 선생은 조국 해방의 그날을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라고 노래했다. 그날이 오면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 광복의 기쁨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그 기쁨을 전하는 북소리가 되고 싶다고 절규한다. 그러나 심훈 선생은 조국의 하늘이 갈수록 어두워가던 1936년 그 절절한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본제국은 식민지 확장을 위한 전쟁에 몰두하면서 더욱 강경하고 혹독한 정책을 시행한다. 일제는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고자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고,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교는 1938년 폐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어서 언론의 통제를 위해 1940년 8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했으며, 한글신문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 남게 됐다.

이렇게 캄캄한 밤, 누가 조국 광복에 대한 믿음을 지켰는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민족의 선각자로 존경을 받던 육당 최남선 선생마저도 이 시기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앞장서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자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친일 행위를 참회하는 '자열서'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얼른 실현하여'라고 서술하며 세계정세에 어두워 조국 광복의 그날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잘못 판단해 일본제국의 패망을 예견하지 못한 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신 분이 조국의 독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것이 육당 선생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수치스러운 역사가 된 것이다.

역사의 그날은 언제인가?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 그날은 어떻게 오는가? 그날은 아무도 모르게 도둑같이 온다. 일본제국이 무너질 날을 누가 미리 알았는가? 원자폭탄이 발명될 것을 누가 미리 알았는가? 역사의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깝다는 것을 우리의 지성으로 예측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역사가 지난 후에 그날이 올 수밖에 없었던 합리적인 원인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그날이 오고 나서야 그날에 대한 믿음을 지킨 분들이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지 비로소 깨닫는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서 발행된 한글신문의 머리기사 제목은 무엇이겠는가? 그날 서울 거리는 광복의 기쁨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인파로 가득찼겠는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우리에게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할 미디어가 없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5년 전에 폐간됐고, 유일한 한글신문 매일신보는 그날이 광복의 날이 아니라 패전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심판의 날이었던 것이다. 그날 매일신보 1면은 일본 국왕의 조서를 일본어로 싣고 있을 뿐이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비에트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그리고 매일신보는 식민지 조선의 국민들에게 "경거를 엄계하여 냉정 침착하라!"고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남북통일의 그날을 염원해 '우리의 소원'을 노래하며 살아온 세대이다. 우리는 그날을 미리 알 수 없지만, 그날 또한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갑자기 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나는 왜 대한민국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가는가? 하나 될 한반도를 위해 살자. 남한 사람들과 탈북민 사이의 분단으로 인한 벽을 허무는 '마음의 통일'이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 만남과 대화,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 평화통일의 씨앗이 되기를 꿈꾸는 청년 엄에스더 '유니시드(UNISEED)' 대표의 말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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