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의 정치제도는 대부분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독재 체제였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고,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중요한 정책이 결정된다. 아테네에서는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에 입법권이 주어졌다. 아테네 시민들은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의사 결정권을 행사했고, 재판에 참여하는 의무를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다.

민주적인 정치 지도자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는 최고의 번영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높은 수준의 학문과 예술이 발달했다. 또한 아테네는 해군 중심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도시국가였다. 아테네는 마라톤에서 1만 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20만 대군과 맞서 싸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페르시아 군대는 오리엔트를 평정한 무적의 군대였다. 그런데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가 그런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승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는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권을 잡았고, '델로스 동맹'으로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민주주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황금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됐다. 민주주의는 과두정치 지배자들에게 전복됐고, 과두 정치체제는 다시 온건한 500인 정권으로 바뀌었다. 민주정치 지도자들이 스파르타의 평화 제의를 거부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민주주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군국주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게 오히려 패배했으며, 이어서 북쪽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에게 정복을 당했다.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한 민주주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5세기 중반부터 아테네에는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교사들이 부유층 자녀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받고 학문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고액의 수업료를 받고 청년들에게 출세 지향적인 교육에 몰두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정의에 대한 주제로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에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정의에 대한 윤리적인 탐색을 비웃는 그의 주장은 당시 아테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판단이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소크라테스가 활약한 이 시기에 아테네는 혼란과 쇠퇴가 시작된다. 시민들에게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독재자에 의한 재판으로 처형된 것이 아니다. 민주시민에 의해 고발을 당했고, 민주주의 법정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아테네 시민 법정 배심원들은 그의 혐의가 모두 유죄라고 인정하고, 형량을 사형으로 선고했다. 이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1표, 무죄 220표, 근소한 표차로 유죄 선고를 받았으며, 형벌을 결정하는 투표에서는 361대 140이라는 표차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처형은 아테네 민주정이 범한 결정적인 실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수 지배 체제가 지닌 위험성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테네 민주정치에 대해 크게 실망한 플라톤은 국가를 구성하는 생산자, 수호자, 통치자 세 집단이 각기 절제, 용기, 지혜의 덕을 발휘해 사회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정의로운 이상국가의 모델로 제시한다. 대화와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삼는 우리 한국의 정치 상황도 정의와 공익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때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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