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넘어 이어온 40년 철권의 역사가 위기에 처했다. 최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변화의 바람은 이웃 나라 리비아를 삼키고 있다. 민주화 열풍이 그야밀로 도미노 현상을 지속하고 있는 것. 특히 리비아는 최고지도자인 무아마르 알 카다피에 의해 69년이래 40년간 철권에 시달려온 나라다. 모레 폭풍의 방향이 리비아를 향하면서 세계의 이목도 북아프리카로 옮겨갔다. 리비아의 최근 소요 사태를 살피고, 카다피의 면면과 운명을 짚어 본다.

 


 

40년 철권이 무너질 것인가. 최근 중동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이집트가 그랬고, 바레인이 그랬다. 중동의 민주화 열풍은 도미노 현상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사막의 모레 바람이 이번엔 40년 철권까지 위협하고 있다.

 

몇 안 남은 철권 통치자

 

최근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소요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초 이집트의 이른바 ‘자스민 혁명’이 또 다른 철권의 상징이던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는 모바일이라는 첨단의 소통 경로를 통해 파괴력을 더했다. 정권이 무너지는데는 채 한달이 걸리지 않았다. 이웃한 리비아가 극심한 내부 소요에 시달리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욱, 리비아는 종전 이집트에 비해서도, 강도 높은 철권을 휘둘러 왔다. 햇수를 따져도 40년.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리비아의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다. 그는 서방의 시각에서 지난 세기 세계사를 수놓은 ‘악명을 드높였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통한다. 이는 우선 그가 권력을 거머쥐는 과정과 무관치 않다. 세계 독재자의 대명사처럼 돼 버린 ‘쿠데타’에 의한 정권 찬탈이었던 것.

 

45년 리비아의 수르트 근처 베두인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0대부터, 아랍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신봉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56년에는 수에즈 사태에서 비롯된 소위 ‘반이스라엘 시위’에 적극 가담할 만큼, 아랍 민족주의에 심취했다. 이후, 63년 벵가지의 리비아대학을 졸업한 후, 6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당시 그는 이집트의 지도자 나세르를 존경한 나머지,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게 된다.

 

일부에 따르면 후일, 카다피가 정변을 일으키는 시발점을 이대부터로 지목하는 등, 탁월한 야심가의 기질이 있었다는 것.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부터 그는 해외 견문을 넓히게 되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헬레나 군사 학교와 영국 등지에서 근무하는 한편, 군사 훈련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입대와 함께 꾸준히 왕정에 대한 불만을 품었던 카다피는 그가 대위이던 69년 9월 급기야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당시 국왕 이드리스 1세는 해외 순방 중이었다. 쿠데타 성공이후 혁명평의회를 조직해 스스로 의장에 오른 그는 이때부터 군사령관을 맡는 등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69년 군사 정변으로 권력 찬탈

 

카다피가 악명을 떨치면서도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더욱 그는 정권을 장악한 시점부터 청년시절 신봉해온, ‘아랍 민족주의’ 구상을 펼쳐 보이며 서방세계에 대한 비판과 대립을 시작, 철저한 반미주의를 실천에 옮겼다.

 

그가 권력을 쥔 뒤, 리비아에 주둔했던 미군부대는 철수를 해야 했고, 한때 리비아를 지배하며 터를 잡고 있던 이탈리아인 등을 추방시키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서방 배척 정책은 이뿐 아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문 산유국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석유 회사의 다수 지분이 외국인들에 의해 지배를 받아 왔다. 이에 따라 카다피는 집권 후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석유를 국유화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며 서방 세계와 마찰을 빚기에 이른다.

 

이렇게 정치권력 장악과 경제권의 확보에 성공한 카다피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지만, 그가 가진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중동에서도 알려진 ‘민족주의자’라는 점은 중동의 정세를 크게 바꾸는 행보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가 꿈꾼이 ‘완전한 아랍의 국가 건설’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카다피는 72년 주변 아랍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문화대혁명’에 나서게 된다. 그가 말하는 ‘완전한’ 아랍 국가란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였던 셈. 자국에서 음주를 금지시키고, 직접민주제를 구상하는 등 예사롭지 않은 국가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에 대한 결실은 72년 이뤄지는 듯 보였다. 카다피는 이웃나라인 이집트와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해 합의를 보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 사다트가 평화정책을 내세우면서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이후,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 사건으로 중동은 또 한바탕, 혼란에 휩싸이게 되지만 카다피의 행보는 계속된다. 이러 80년 시리아와 합방에 합의는 등, 개가를 올리지만 때마침 발발한 이란과 이라크 전쟁으로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중동의 연합체 구성에 그가 기울인 노력만큼은 다소 평가될 만하다는 시각이다. 이는 그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한 뒤 주변 비동맹국가들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석유자원을 노려온 서방의 의도에 맞서 지속적인 경제 제재 속에서도 독자 노선에 질력했다는 일각의 평가는 귀기울일 만 하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장기 집권에 따른 폐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자국내 정치적 압제나, 인권 탄압, 테러, 핵실험 의혹 등이 여기에 속한다. 더욱,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운 그의 철권은 자연히 세계 패권을 쥔 미국과 군사적 마찰까지 빚게 된다. 미국의 팽창주의가 절정에 달하던 80년대 중반, 카다피는 미국으로부터 ‘테러 지원국’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당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그의 암살 계획을 시도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40년 통치, 대단원 향하나?

 

급기야 미국은 86년 리비아에 대한 폭격을 단해하게 되면서 양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최근 카다피의 사주로 이뤄졌다고 알려져 재차 관심을 모았던 88년 팬암기 폭파사건은 카다피의 강경 노선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평가다. 이일로 리비아는 유엔 안보리로부터 제재를 받았게 된다.

 

그러나, 철권 통치의 대명사처럼 돼 버린 카다피도 변화된 정세에는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특히 그는 세계 7위의 산유국임에도 불구, 서방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인해 국내 경제가 위기가 위기에 처하면서 결국 ‘앙숙’ 미국에 화해의 손을 뻗게 됐다. 그는 2003년 대량살상무기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며 2004년에는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미국은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 경제 제재 조치를 푸는 계기를 마련했다.

 

철권과 은둔으로 대표돼온 카다피의 최근까지의 행보는 이전과는 크게 다른 변화를 보여왔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물론이고 식민지배의 악연이 있던 이탈리아를 찾아가 사과를 받아들이는 등, 비교적 전향적 외교력을 과시해 온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 이집트를 시발로 불어닥친 중동의 민주화 열풍이 이웃한 리비아로 향하면서 그의 화해 정책은 빛을 보기도 전에 사장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40년 유례를 찾기 힘든 철권의 역사가 대단원을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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