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는 꿈과 비전의 인물 요셉이 등장한다. 꿈 많은 소년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 온갖 고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지만,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꿈을 지혜롭게 해몽하여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7년 풍년이 계속되는 동안 곡식을 충분히 비축하여 이어 지속되는 흉년에 이집트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자기 동족까지도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구했다.

그런 위대한 업적으로 요셉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모든 가족 70여 명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파라오가 베푸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정착하였다. 요셉은 파라오에 버금가는 최고의 부와 명예와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의 화려한 생애를 마감하면서, 자손들에게 "내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요셉은 그의 후손들이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을 비전으로 제시하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430년 후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지도자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출발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광야생활을 인도한 모세는 가나안 땅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사명을 마친다. 결국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야 요셉의 유골은 비로소 그 약속의 땅에 안장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요셉의 유언을 따라 500여 년 동안 대대로 비전의 릴레이를 이어갔던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역사의 드라마인가?

마포삼열(미국명 사무엘 마펫) 박사는 1890년 26세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우리 민족 역사의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기에,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고자 이 땅에 왔다. 한반도를 여러 차례 답사한 후,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녘 지역에서 그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과 청일전쟁의 격전지로서 평양은 그 참화가 극심했으며, 콜레라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어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민들의 곁을 지키며, 그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마포삼열 박사는 조선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평양신학교, 숭의여학교,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을 비롯하여 300여개의 초중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46년 동안 오직 조선의 선교와 교육을 위해 혼신의 열정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경해져서 조선의 모든 교회와 학교에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마포삼열 박사가 끝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일제는 1936년 결국 그를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왕복 티켓을 들고 경의선 열차를 탔다.

미국에 도착한 마포삼열 박사는 고령의 투병 중에도 "이제 곧 조선으로 돌아가리라."는 소망을 품고 기도하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 생각만 했어요. 일본의 압제로 고통당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셨죠. 그리고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 그곳에 묻히겠다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아들 하워드 마펫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10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임종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8년 폐교당한 평양신학교, 숭의여학교,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은 해방 후 서울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리고 그가 한국을 떠난 지 70년이 지난 2006년 5월 그의 유골은 비로소 광나루 장신대학교 교정에 안장되었다. 그렇지만, 암살의 위험 속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면서 왕복 티켓을 들고 평양역을 떠난 마포삼열 박사가 평양의 장대현 언덕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이루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 대동강변에 그의 유골을 다시 안장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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