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마포삼열(S. A. Moffet, 1864-1939) 선교사는 우리 한국인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한국인은 지적이고 매력적입니다. 체면을 앞세우고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인식만 버린다면 장차 강한 민족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46년간 한국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높은 수준의 현대식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 교육을 통해 윤동주, 조만식 등 북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애국 청년들이 성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안창호, 김구 등 독립지사들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1891년 청년 이기풍이 마포삼열의 방 창문으로 돌을 던졌다. 그러나 집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그후 마포삼열은 장터에서 선교하다가 이기풍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기풍을 용서하였다. 오히려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이기풍이 꿈에 "기풍아! 왜 나를 미워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마포삼열을 찾아가 회개하였다. 새롭게 변화된 이기풍은 1896년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 초대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제주도의 첫 개척 선교사가 되었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다. 그러자 마포삼열은 매큔, 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 사건인데다가 비인도적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당시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항의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그런 만행을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1919년 3.1운동은 인류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비폭력 평화 시위운동이다.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잔혹한 식민 통치를 받는 상황에서 온 국민이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임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평화로운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3천여 명의 기독교인들은 서울의 탑골공원에서보다 먼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도 이 독립선언식에 참석했으며, 기미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이승훈,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5명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이라는 기사에서 마포삼열과 그의 동료 선교사들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 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삼열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마포삼열은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과 함께 3.1만세 시위운동의 비폭력성과 일제의 야만적인 폭력 진압 사실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리고 미국인 신분을 활용하여 그의 집과 그가 세운 학교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근거지를 제공했다. 3.1운동을 비롯한 중요한 독립운동이 그의 집에서 논의되었고, 평양판 <독립신보>가 그의 서재에서 탄생했다.

이와 같이 우리 한국의 독립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마포삼열은 일제의 감시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조선 사람의 편에서 일본 관원들과 맞서 싸웠으며, 국제사회에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마포삼열은 일제의 집요한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였고, 그가 세운 학교들이 폐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 더 크고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일깨웠다. 그는 1939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기도했다. 마포삼열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키워낸 대부이자,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숨은 손'이었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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