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는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암흑시대에 4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으니 우리 한국인의 삶 자체가 극심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는 그처럼 칠흑같이 캄캄한 밤하늘에 별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손양원은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여 한센병 환우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섬겼다. 그는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1940년 9월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에 대한 심문조서와 판결문에는 그의 설교 내용이 죄목으로 기록되어 그의 신앙과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일본제국이 신격화하고 있는 역대의 일본 천황은 신이 아니다. 사악한 전쟁에 몰두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통치체제는 반드시 망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렇게 외치는 그에게 일제의 강압과 위협은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는 1943년 5월 17일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종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방구금형을 선고받고, 경성과 청주의 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서슬이 퍼렇던 일본제국도 마침내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손양원은 해방된 조국에서 8월 17일 석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석방된 후, 그는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가서 한센병 환우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도 잠시, 조국은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948년 10월 여수에 집결해 있던 군인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순사건이 발생하였다. 반란군에 의해서 여수와 순천은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은 손 목사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계엄군에 의해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한 청년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 목사는 안재선을 용서하고,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그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한 가족으로 삼았다.

안재선을 용서한 손 목사의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손 목사야말로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승리자라고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그리고 그는 손 목사를 직접 찾아가 자신이 세우려고 계획하는 학교의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한센병 환우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고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이 호남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지만,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애양원의 환우들은 북한군이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해치지는 않을 테니 손 목사에게 피난을 떠나라고 간곡히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목사라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바로 그 날, 모진 고문 끝에 총살당하여 순교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우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랑의 봉사자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이다. 아울러 그는 좌우익의 이념대립으로 동족상잔의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른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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