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9년 초등학교 2학년 어린 시절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기억한다. 선생님의 친절한 수업으로 한글을 배우고 산수를 익혀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반 친구들이 협동해서 교실 청소를 깨끗이 했다고 칭찬을 듣기도 하며 즐거운 힉교생활을 하였다. 우리 교실 앞면 중앙에는 태극기 액자 아래에 항상 대통령 할아버지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통령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자랐다.

3학년이 된 1960년 4.19학생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에서는 우리가 존경하는 대통령을 갑자기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당시 어린 나로서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대통령 할아버지에 대한 동시를 짓자고 하시던 일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남았다.

내가 성장하여 1978년 시골의 중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부모가 돼 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당시의 초중등학교 교사들은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정치제도가 우리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민주주의라고 가르쳐야 했다. 1979년 8월 말 나는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공개수업을 하게 됐다. 몇 명의 학생들이 간단한 상황극을 보여주고 학생들이 자유로이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공개수업 후 담당교사인 나의 소감을 발표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 시절 사랑하는 우리 선생님을 기억하며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1년도 안 되어 선생님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교사는 언제나 진실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후 채 2개월이 되지 않아서 10.26사태가 일어나고 갑자기 교육과정이 개정되는 것을 보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였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란 주장은 대체로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으로부터의 중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 한국의 정치 상황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보수 성향의 정당과 진보 성향의 정당이 몇 차례 정권교체를 교대로 이루면서 그때마다 교육정책의 방향이 극단적으로 변화하면서 교육현장이 큰 혼란에 빠지곤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교육이 백년대계로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중립이 요청되는 현실이다.

물론 교사도 한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활동에 참여해야 하고, 학생들도 학교에서 민주 시민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민주국가에서 엄밀한 의미의 정치적 중립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교육이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나 편향된 이념에 치우치지 않도록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세대가 살아갈 아름답고 영원한 가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의 당파성 혹은 편향성을 배제해야 한다. 공교육이 특정 정당의 주장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공교육이 특정 정당에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이용되거나 특정 교육 내용이 당파성을 띤다거나 편견을 조장한다면 이를 제재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요청되는 것이다.

정치 권력은 교육에 과도한 개입을 피해야 한다. 권력자가 교육 내용을 좌지우지 간섭한다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지탱하는 한 축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당파성과 편향성 극복은 학생, 교사, 학부모와 같은 교육 주체들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 헌법은 교육내용과 교육과정을 교육자가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 이 교육의 자주성에 입각하여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오늘 우리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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