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신문=이종주 기자] "이웃집에 젖소가 한 마리 생겼는데 덕분에 이웃이 큰 부자가 됐어", "그럼 이웃집처럼 젖소를 한 마리 구해드릴까요?", "아니, 이웃집 젖소를 죽여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램프 요정의 말에 농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미국 작가인 마이클 프렐은 러시아의 이 구전을 인용하며 '언더도그마'(underdogma)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젖소를 갖지 못한 농부가 단지 젖소가 없다는 이유로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되고, 젖소를 가진 농부는 단지 젖소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

구태여 러시아의 젖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구전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많은 부분에서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불법 노점이 그렇다.

그 역사와 기원조차 알 수 없는 불법 노점이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다. 어쩌면 한 세기도 더 됐을 법한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상 모든 국민은 납세의 의무를 진다. 세금조차 내지 않는 이들은 그야말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남았다. 불법 노점보다는 '무법자'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표현 아닌가.

나아가 노점상 연합 같은 단체를 꾸려 국가와 헌법에 조직적으로 맞서고 있다. 강제 철거 소식에 전국에서 모여들어 집회를 연다. 정당한 공무 집행에 대항하는 불법 단체라면 외려 반군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불법 노점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경제의 대원칙을 따른다. 공급이 있는 것은 수요가 있어서다. 즉 이들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시민이 노점에서 소비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情)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불쌍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할 동정심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법 노점에 가려진 자영업자의 생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노점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에 의해 궁지에 내몰린 자영업자는 우리 사회의 강자인가.

해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자영업자가 생활고를 못 이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그들이 흩뿌린 눈물의 무게와 그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법 노점상의 생계만이 동정의 대상으로 남아야 하는 것인가. 그 뒤에 가려진 자영업자의 눈물은 누가 나서서 닦아줄 것인가.

시민들의 마음속에 '언더독'으로 남는 이상 불법 노점은 근절되지 않는다. 선한 약자가 아닌,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약자다. 합법과 불법, 무엇을 지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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