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동교회를 설립한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에게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백정들이 많이 다니는 승동교회에 양반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그런 차별을 할 수 없다고 이를 거절하자, 양반들은 교회를 분리하여 따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연동교회에서도 장로선거에서 갖바치 출신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따로 교회를 세웠다. 이렇듯 한국 초대교회에는 신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전라도 금산교회에 '주인과 머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산교회는 남녀가 서로 떨어져 앉아서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할 수 있도록 지은 ㄱ자 교회이다. 이처럼 남녀차별, 신분차별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조선말의 일이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테이트 선교사(L.B.Tate)가 김제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서 그를 전도하였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은 김제 최고의 갑부였으며, 교회를 지을 땅을 헌납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조덕삼의 소작농이었다. 나이도 조덕삼이 이자익보다 15살 더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인과 머슴이 함께 장로 후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선거에서 누가 장로로 선출되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뜻밖의 투표 결과가 나왔다. 주인인 조덕삼이 아니라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가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1909년에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하였으며, 그 후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초빙하여 평생 진실하게 섬겼다.

미국의 비폭력 인권운동 지도자 말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그 연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인종차별이 없는 '사랑의 식탁'을 꿈꾼다고 호소하였다. 노예였던 사람의 자녀와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자녀가 한 식탁에서 식사를 나누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이보다 60여년 전, 신분과 체면을 생명처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조덕삼 장로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머슴 이자익을 공동체의 지도자로 섬기는 모범을 보였다. 이자익 목사도 조덕삼 장로의 임종을 지켰으며, 평생 은인의 유지를 받들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농촌 목회에 전념했다. 한국 장로교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고, 1954년에는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평생 낮은 자리에서 목회자로 살았다.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헌신할 진정한 지도자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우리의 현실이기에,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주인과 머슴' 이야기가 더욱 아름다운 메시지로 우리의 기슴을 흔든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