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은 조선시대 유명한 상업도시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중요한 거점도시가 되었다. 넓은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다양한 농산물의 교역이 이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해상운송 및 어업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강경은 물류의 중심지로서 곡물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기에 매우 용이하고 편리한 곳이었다.

아침에 강경행 버스에 올라 타면서도 '강경 성지순례'란 말이 내게는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었다. 강경 병촌교회에 도착하여 <66인 순교자 기념탑> 앞에 서자 그제서야 믿음의 선조들의 뜨거운 마음이 밀려왔다. 강경, 이 거룩한 땅을 과거 풍요로운 '상업도시'로만 알았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나는 그때 비로소 강경 성지 순례자가 되어 66인 순교자의 땅을 숙연한 마음으로 밟기 시작했다.

병촌교회 앞 <66인 순교자 기념탑>은 1989년에 건립되었다.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형태는 순교자 정수일 집사가 순교 당시 손을 하늘로 우러러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형상화했으며, 66조각의 대리석은 순교자 66명을 상징한다. 기념탑에는 66인 순교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어린이 순교자가 31명이나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호남지역을 점령하여 3개월 동안 주민들에게 온갖 박해를 하던 북한 공산군은 9월 27일, 28일 마지막으로 퇴각하면서 병촌교회 신자 남자 27명, 여자 39명, 66명을 잔인하게 집단 학살했다. "이 나라와 교회와 가족을 도우소서!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 영혼을 받으소서!" 순교자들은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기도하며 숨졌다고 한다. 순교자 기념관 천정에는 66개의 전등이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이어 찾아간 강경교회 앞에는 <신사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가 서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한 교사와 어린이들의 똑바로 선 자세, 총명한 눈빛, '신사참배 거부'를 외치는 입 모양이 선명하고 힘차다. 일제는 조선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조선의 중요한 거점도시인 강경에도 신사를 짓고, 이 정책을 시행에 옮겼다.

1924년 10월, 일제는 신사 참배일을 맞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옥녀봉의 신사에 참배하는 시간을 갖도록 지시한다. 이에 김복희 선생과 62명의 어린이들은 "절대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를 밝히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학교 당국이 신사참배를 계속 거부할 경우, 교사는 면직시키고, 학생들은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김복희 선생과 62명의 학생들은 당당히 학교 당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 사건은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었다. 일본인 교장이 김복희 선생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했지만, 김 선생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면직을 택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62명 중 많은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당했다.

.강경보통공립학교에는 이처럼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어린이들이 많았다. 그 당시 일제는 보통학교에서 조선역사를 빼고 일본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역사 시간에 조선인 교사가 떠나고 일본인 교사가 오자, 윤판석 등 '강경 상애소년단'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육 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교장실에 끌려가서 교장의 꾸중을 듣게 된 윤판석은 오히려 강력하게 따져 물었다. "우리가 조선 사람인데, 왜 일본역사를 먼저 배워야 합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 상애소년단 어린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윤판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해발 47미터 강경의 최고봉이라는 옥녀봉에 올라 동서남북 넓게 펼쳐진 평야와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금강을 바라보며, '어린이 신사참배 거부자, 어린이 순교자!' 하늘에 빛나는 귀한 모국어를 가슴에 깊이 새긴다. / 유원열 목사·전 백석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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