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조선에 입국해 대한민국 독립에 큰 기여를 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
1885년 조선에 입국해 대한민국 독립에 큰 기여를 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

19세기 말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성들은 빈곤과 무지와 질병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정치 지도자들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대립과 권력 투쟁을 이어갔다.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외세가 이런 한반도를 서로 차지하고자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이어서 실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1897년 을미사변, 1904년 러일전쟁에 이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1910년 조선은 결국 일본에 합병되어, 일제강점기 암흑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이처럼 무너져 가는 나라 조선 땅에 입국하였다. 그런데 그는 1908년에 출판된 「코리아의 소명」에서 놀랍게도 '뉴 코리아'의 비전을 제시했다. 

"오늘 나는 내 눈앞에 뉴 코리아를 명료하게 바라본다. 뉴 코리아는 폭정과 무지와 미신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 나라, 곧 정치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하게 해방된 나라이다. 나는 코리아의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에 세워진 학교를 본다. 그리고 나는 코리아의 주요 도시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세워지고, 모든 도시에 자립 능력을 갖춘 병원이 세워진 것을 본다. 나는 코리아가 중국과 일본에 강력하고도 온화한 영항력을 끼쳐서 그들의 편견과 완고한 태도를 완화시키고, 신뢰 관계를 튼튼하게 세우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한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가 위대한 연합을 이루는 것을 본다."

제물포항에 상륙한 언더우드는 26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폭정과 무지와 미신의 노예 상태에 있음을 보았다.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과 관리들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참으로 극심하였다. 400여년 전,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하였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글 교육조차 받지 못하여 평생 문맹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선에는 마을마다 성황당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이 온갖 미신이 만연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폭정과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 나라 '뉴 코리아'의 비전을 품고 기도하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고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건물도 없고,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고, 경계와 의심만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 이후 조선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더욱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믿음과 소망의 열정으로 '뉴 코리아'를 꿈꾸며, 동료들과 함께 조선에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워 운영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바쳤다. 코리아의 미래를 위한 교육과 의료와 선교에 헌신한 것이다. 언더우드가 100년 후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을 '뉴 코리아'의 비전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지금 우리 한국에는 마을마다 도시마다 교회와 학교와 병원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과 의료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북한의 동포들이 우리와 같은 수준의 의료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비무장지대가 평화의 공원이 되고, 온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자유로이 왕래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은총의 땅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유원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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