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배재대 교수

일본 노벨상의 산실이자 기초과학의 요람인 리켄을 언급하지 않고는 일본의 과학기술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유일한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종합연구소인 이곳을 '리켄'(RiKen)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의 일본 발음인 Rikagaku Kenkyusho에서 각각 Ri와 Ken을 가져와 만든 줄인 말이기 때문이다.

리켄이 기초과학연구소로 출발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당시 일본은 독일에 의존해 왔던 화학공업제품을 더 이상 수입할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드레날린(Adrenaline)이란 호르몬을 발견했던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高峰譲吉, 1854~1922)는 세계 산업계가 기계공업에서 이화학공업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기초 연구를 수행할 이화학연구소 설립을 주장하였다. 세계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이 일등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방자원의 자급자족과 물리학, 화학 등의 순수과학에서 공업진흥에 필요한 응용 연구까지 가능한 민간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서 일본 황실과 정부, 그리고 산업계로부터 보조금과 기부금을 지원받아 민간연구소이자 공익연구기관으로, 즉 반관반민 형태로 출발한 것이 오늘날 리켄의 역사이다.

사실상 이때를 기준으로 일본은 과학기술의 연구가 조직적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물리학자인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1890~1951)는 1928년 리켄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면서 지금껏 권위의식에 젖어 있던 일본의 연구방식과는 달리 어떤 연구자든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주제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권위주의를 없애고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데 주력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폐쇄적이고 연공서열적인 일본 대학과는 완전히 달랐던 이러한 분위기를 리켄의 최대 장점으로 꼽고 있다.

니시나는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날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닐스보어를 초청하고 싶었지만, 유럽에서 일본까지 두 달여 걸리는 여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1929년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와 디랙(Dirac,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초빙하여 교토대에서 강연회를 개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때 쿄토대학 2학년생이던 도모나가 신이치(朝永振一郎, 196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와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4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이들 강연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얻으면서 내용에 대한 충격도 컸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나이가 너무 젊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28세의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27세의 디랙은 22세의 유카와, 23세의 도모나가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이들은 이미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 이들 두 젊은이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최근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패전 후 일본을 점령한 GHQ는 일본 황실의 기부금에 더하여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등 재벌기업의 출연금을 받아 설립되었다는 이유로 리켄의 재단 법인을 해체하였다. GHQ가 떠난 이후인 1958년 리켄은 특수법인으로 다시 출발하였고, 2003년 이후부터는 문부과학성 산하의 독립 행정 법인으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리켄은 출발 당시부터 주임 연구원 제도를 도입해 연구 테마와 예산, 그리고 인사권 등 모든 권한을 주고 연구실을 운영하게 하여 독립된 연구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연구원들은 새로운 연구 계획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시만 하여도 즉시 시험적으로 일정액의 연구비를 제공받아 그 연구를 과연 계속 추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가 판명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 게다가 연구 성과로 특허와 실용신안을 얻을 경우 기업 설립이 가능하고, 그럴 경우 기업에서 나오는 특허권과 사용료는 연구소 자산으로 돌려 연구 비용을 충당하게 했다. 이러한 인센티브 덕분에 리켄 설립 후 20여 년 만인 1939년에 이르자 창업된 기업들이 약 60여 개에 이르렀고 연구비의 80%가 이들 기업에서 얻은 수익으로 충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기업이 리코이다. 리코는 패전 후 페니실린과 비타민 제조 판매에 성공했으며. 지금은 대학과 연계하여 줄기세포를 개발 중이다.

물론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어서 부정적인 뉴스가 흘러나올 때도 있다. 일본판 황우석 사건이라고 하는 '오보카타 하루코(小保方晴子)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4년 1월, 혜성처럼 등장한 30대 여성 과학자 오보카타 하루코가 네이처에 '만능 세포'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결국은 연구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망신살을 톡톡히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한두 가지 뉴스를 제외하고는 리켄이 세계적인 연구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앞서 소개했던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 그리고 200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노요리 료지(野依良治)도 리켄에서 연구한 결과로 수상을 했다. 그 외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모리타 코스케(森田浩介)는 2004년 113번 원소인 니호늄을 발견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양 최초의 원소 명명권을 가져오는 쾌거를 이루었다. 모리타가 리켄에 입사해 제안서를 준비하는 데만 10년이란 세월을 보냈고, 입자가 충돌해서 원소를 만드는 데까지는 12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기다려준 리켄도 그렇고 포기하지 않은 연구자도 대단한 인내심들을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도 일본의 리켄과 같은 연구원이 있다. 2011년, 이명박 정부 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고 우수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기초과학연구원이 출범했다. '노벨상 산실'로 불리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를 모델로 만들었으며, '세계 10대 연구소', '노벨상급 과학자 보유 1위 연구소'를 만들 목표로 2018년 대전 엑스포 부지인 도룡동에 IBS의 본원을 설립하고 연구단과 행정 조직을 이전했다. 그러나 최근 '과학계 카르텔' 이야기가 나오고 난 후 내년 예산이 15%나 삭감되면서 경쟁력을 갖춘 창조적인 연구에 대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실패는 한국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정부도, 관료도, 국민도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과학기술에 대한 생색내기 투자와 이공계를 기피하는 국민 의식 등도 과학자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이러한 압박감과 성과주의식 연구개발에 내몰리게 되면 장기적으로 시간을 요하는 연구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2023년 현재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미국적 취득자 3명 포함 29명으로, 노벨경제학상 외에는 전 분야에서 골고루 노벨상을 배출했다. 평화상 1명, 문학상 3명을 제외하면 25명이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반면 대한민국에서의 노벨상은 2023년 현재에도 요원할 뿐이다. 대한민국이 물리학에 대한 깊은 인식과 화학의 신비로움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나아가 과학자들이 꾸준히 한 가지 주제로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낼 때까지 정부의 일관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의 뒷받침이 따라 준다면 우리나라에도 노벨상의 희망이 보일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목표와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 할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강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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