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으로 연기가 치솟는 가자지구. 사진=뉴시스
폭격으로 연기가 치솟는 가자지구. 사진=뉴시스

성탄절에도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전쟁의 여파로 온 세계가 고통을 겪고 있다. 쌍방의 무차별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인, 부녀자와 어린이, 심지어 환자들까지 잔혹하게 희생되고 있으니, 그 가족들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인류의 역사에 이런 잔혹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그러나 예수의 출생을 기뻐하며 축하한 사람들은 밤중에 베들레헴 벌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 그리고 먼 동쪽 나라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뿐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권력자 헤롯왕은 예수의 탄생을 자기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아기 예수를 찾아서 죽이

려고 하였다. 그래서 요셉은 밤에 아기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이주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헤롯왕은 잔인하게도, 베들레헴과 그 지역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학살하였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베들레헴 하늘에 처절하게 울려 퍼지지 않았겠는가?

예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에 이렇게 탄식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는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보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오늘 너희가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그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너희 원수들이 너희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공격하면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짓밟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임종 직전 기록한 마지막 노트 「눈물 한 방울」을 남기셨다. "병상에 누워 있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눈물 한 방울'이었다." 그는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말한다.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로봇을 아무리 정교하게 잘 만들어도 로봇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우리는 피를 흘려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을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아직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바로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는 눈물 없는 자유와 눈물 없는 평등을 추구하며 피와 땀을 흘려 투쟁하면서, 오히려 문명을 초토화시켰다는 것이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통찰이다.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자유와 평등을 하나가 되게 하는 눈물 한 방울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눈물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먼저 목놓아 운다고 한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동료 사슴들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기 위해 운다는 것이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사슴만이 먹이를 발견하면 그것을 함께 먹을 동료들을 부르기 위해 운다고 한다. 우리 인간들은 혼자 먹고 남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한데, 사슴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 동료 사슴들과 함께 먹이를 나눈다는 것이다. 사슴의 울음소리에는 자기 홀로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우리는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배워야 한다. 동료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목놓아 우는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우리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유원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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