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작업 중 잠시 휴식 중인 파독 광부들
힘든 작업 중 잠시 휴식 중인 파독 광부들

독일 베를린의 한인교회에 부임한 장원준 선교사의 이메일 편지를 받았다. 60년 전에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던 한국인들을 섬기고 있다는 소식이다. 

"저희가 섬기고 있는 어르신들은 1960~1970년대에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셨던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이십니다. 20대에 나라를 위해 이곳에 파견되어 60년 가까이 이곳에서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오신 훌륭한 분들입니다. 한국에서 사셨던 세월보다 더 오랜 세월을 낯설고 물설은 외국에서 평생을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이제 치매가 오고 병도 생겨서, 예배조차 드리기 힘든 분들도 계십니다"

박경란 선생은 파독 간호사 스물 한 분의 아름다운 생애를 인터뷰하여 「나는 파독 간호사입니다」를 출간하였다. 책 제목에 국가, 가족, 이웃을 위해 떠나야만 했던 꽃같은 우리 딸들의 소명과 기록이라는 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지극히 짧게 압축된 파독 간호사 개인의 이야기 속에 우리 한국의 지난 60년 역사가 진하게 녹아 있어 진주조개와 같이 반짝인다.

김금선씨는 동생을 독일로 초청해 대학 공부를 시켰다. 남동생은 베를린 공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고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남편 우베씨와의 독특한 결혼계약서에서 당시 한국 여성들의 간절한 소망을 읽으며, 가슴에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첫째, 남동생의 공부를 도울 것, 둘째, 한국에 돈 보내는 것을 허락할 것, 셋째, 금선이 무용하는 것을 인정할 것 등 세 가지이다. 그녀가 독일에서 가야무용단을 창단하고, 세종한글학교 무용교사로 봉사하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박모아덕순씨는 1951년 6.25전쟁 중에 출생하였다.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는 그해에 전사하였고, 덕순이 4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그녀는 어린 자기를 두고 집을 떠나는 어머니의 뒷모습만을 기억한다. 덕순은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성악가의 꿈을 꾸며 독일행을 결심한다. 홀로 계실 할머니를 걱정하는 손녀에게 주신 할머니의 권고가 눈물겹다. "내 걱정은 말고 구라파 가서 높은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 파독 간호사 덕순 씨가 성악가가 되어 한국 공연 후 어머니를 상봉하는 장면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정광수씨는 남편 피터씨의 고국 우간다에 아프리카 에이즈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우간다에 병원과 직업학교를 세웠다. 정씨는 현재 아들과 함께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아프리카에 희망의 꽃씨를 퍼뜨린다. 자신이 어린 시절 절망의 순간에 먼 땅 독일을 희밍의 빛으로 바라봤던 것처럼, 지금은 우간다인들이 독일 땅 한국인 정씨를 바라보며 꿈을 키운다.

60년 전,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어렵던 시절에 멀고 먼 독일에까지 가서 다문화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들 덕분에 지금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 <국제시장>의 이 명대사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가 남긴 절절한 메시지이다.

지금은 세계 17개국에서 공식적으로 우리 한국에 근로자를 파견하고 있다. 한국어 교실에 몽골인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찾아와 수업을 시작하면서 파독 근로자들의 역사를 소개하며, 그들을 격려한다. "몽골은 서울에 노동사회복지부 한국사무소를 설치하여 몽골인 근로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몽골인 근로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상담치료사까지 파견했습니다. 몽골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몽골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몽골은 반드시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몽골과 한국은 앞으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가장 위대한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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