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 열번 우승…해태왕조 구축

[월요신문 오아름 기자] 2015년 3월 28일,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야구시즌이 찾아왔다. 올해는 KT 위즈의 가세로 10구단 체제가 꾸려지면서 경기수가 576경기에서 720경기로 144경기나 늘었다. 지난해 경기당 평균 관중인 1만1302명만 유치해도 올해 총 예상 관중은 813만7440명으로 8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있다.

10구단 중에서도 광주광역시에 연고를 둔 기아타이거즈는 광주는 물론, 전국 각지에 상당 수의 골수 팬을 두고있다. 프로 스포츠가 연고지 중심인만큼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전라도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비연고라하더라도 기아타이거즈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도 많다는 뜻이다.

기아타이거즈의 전신은 해태타이거즈로 어떤 팀인지를 설명하는 데는 긴 말이 필요치 않다. 해태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출범 30년 동안 열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 열번 모두 우승한 무적의 팀이다.

이중 1983년부터 1997년 사이에만 아홉번의 우승을 기록해 프로야구사에 유일하게 ‘왕조’를 이룩한 팀이기도 하다. 7명의 정규시즌 MVP와 50명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한 스타 군단, 그게 타이거즈라는 팀이였다.

지금까지 국내 프로야구계에는 타이거즈와 같은 팀은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해태의 영욕 V10과 함께 한 서울 잠실야구장. 해태는(기아포함) 이곳에서 모두 8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았다. 정수남 기자

해태타이거즈?…시작은 ‘미약’

해태타이거즈의 시작은 너무 초라했다. 1982년 1월 30일 광주 해태제과 강당에서 창단식을 갖고 프로야구 세번째 팀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날 선수단에는 ▲김동엽(감독) ▲조창수, 유남호(이상 코치) ▲김용남, 이상윤, 강만식, 방수원, 신태중(이상  투수) ▲박전섭, 김용만, 김경훈, 홍순만(이상 포수) ▲김성한, 김봉연, 차영화, 조충열, 최영조, 차정득, 임정면(내야수) ▲김준환, 김일권, 김종모, 김종윤, 김우근(외야수) 등 16명이 포함됐다.

당시 가장 먼저 창단한 OB 선수단이 25명, 최약체로 꼽힌 삼미가 23명임을 감안하더라도 해태는 초라한 규모의 선수단으로 출발했다. 다만, 시즌 시작을 전후해 조충열, 김경훈, 홍순만, 임정면, 김일권 등이 가세하며 21명으로 늘기는 했으나, 타이거즈는 늘 선수 부족으로 허덕였다.

이는 프로야구 출범 당시 호남 지역은 광주항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고,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권에 야구단을 운영할 만한 자금력을 갖춘 기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기업으로는 삼양사, 금호실업, 대한교육보험 등이 거론됐으나, 이들 기업 모두 한사코 프로야구팀 창단 제안을 고사했다.

결국 설득 끝에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 프로야구 참여를 결정하면서 호남 지역의 주인이 정해졌다. 구단 명칭은 ‘정통성과 민족기상의 표상이 되는’ 호랑이를 뜻하는 ‘타이거즈’로 정했다.

1986년 ‘공포의 검빨유니폼’ 해태 왕조의 시작

해태 왕조가 막을 열게 된 것은 1986년이다. 이때부터 해태는 팀 내외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코칭스태프에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 재일교포 박정일 코치를 영입했으며, OB와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를 라인업에 추가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포스트시즌 제도의 변화가 해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985년까지 전후기 1위 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으나, 같은 해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을 따내자 1986년부터는 전후기 2위 팀에게도 포스트시즌 진출권이 주어지게 된 것.

해태는 해당 연도 시즌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하고서도 한국시리즈에 직행, 제도 변화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게다가 1986년은 해태에 우수한 신인 선수들이 대거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다. 광주일고-건국대를 거친 차동철과 ‘까치’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등이 시즌에 한꺼번에 팀에 합류했다.

이전까지 고질적인 선수 부족에 시달리던 해태 입장에서 좋은 선수들의 가세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실제 차동철은 데뷔 첫해 10승을 따냈으며, 마운드에 큰 힘이 됐고, 김정수는 시즌에서 9승에 그쳤지만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혼자 쓸어 담으며 시리즈 MVP에 올랐다. 여기에 2년차에 접어든 선동열이 24승, 0.99의 평균자책을 기록해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당시 부상에 신음하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10승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해태 마운드의 시즌 팀 평균자책은 2.86으로 웬만한 팀 에이스 투수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삼성과 맞붙은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향후 두팀의 운명을 가른 명승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은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김성래가 7회 홈런을 쳐내며 2-0으로 앞서갔다. 이후 해태 타선은 삼성 에이스 김시진이 등판한 8회부터 폭발했다. 8회말 김봉연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뒤에 1-3으로 뒤진 9회말 김일권의 3루타와 만루에서 나온 김성한의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연장으로 이어진 11회말, 2사 2루에서 김성한의 끝내기 중전안타가 터지며 4시간 9분에 걸친 혈투가 끝이 났다. 당시 삼성은 에이스 김시진의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배, 아픔이 두배였다.

타이거즈는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에이스를 만나도 위축되는 법이 없고, 투수가 선취점을 내주면 다음 공격에서 곧바로 동점 내지 역전을 만들었다.

3차전이 끝난 뒤 터진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은 버스 뿐만이 아니라 해태 선수들의 승부욕에 불을 붙인 사건. 결국 해태는 4승 1패로 두번째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삼성은 세번째 한국시리즈 도전에서도 쓴 잔을 마셨다.

해태의 1986년 우승은 시작에 불과, 해태는 이듬해인 1987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나 4승 무패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고비 때마다 큰 것 한 방을 터뜨린 김준환이 시리즈 MVP가 됐다.

1988~89년에는 상대가 삼성에서 빙그레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88년에는 문희수가 눈부신 호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89년에는 박철우가 맹타를 휘둘러 각각 시리즈 MVP에 올랐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연패로 물러나며 한해를 쉰 해태는 1991년 다시 빙그레를 꺾고 우승해 통산 6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다. 삼성과 만난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신인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우승, V7의 신화를 달성했다.

그 시절 해태 팬들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반면, 삼성과 빙그레는 해태와 각각 세차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고배를 마시면서 해태 왕조의 최대 피해자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당시 해태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는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차별과 억압에 울던 팬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일종의 정치, 사회적인 대리전이었으며,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도 같았다.

   
2001년 기아자동차가 새 주인이 되면서, 해타타이거즈는 19년 영욕의 역사를 접었다.

“종범이도 없고, 동열이도 없고…”

해태가 낳은 1990년대 최고의 스타는 단연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다. 광주일고-건국대를 졸업하고 1993년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은 첫해부터 한국시리즈 MVP가 되면서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1994년에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3할9푼3리의 타율에 19홈런, 84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득점, 최다안타, 도루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타선에 이종범이 있다면 마운드에서는 조계현이 새로운 에이스로 등장했다. 군산상고-연세대를 졸업하고 1989년 입단한 조계현은 2년차인 1990년 14승에 3.28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93년에는 강력한 싱커를 앞세워 17승을 따내며 팀 우승에 기여했고, 이듬해에는 개인 최다인 18승으로 2년 연속 다승 1위에 올랐다.

그 외에도 돌직구를 자랑하는 이대진, 비운의 투수 김상진, 고무팔 임창용, 홍현우 등 해태에는 새로운 스타가 끊임없이 등장했다.

해태의 왕조는 1997년이 마지막이었다.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선동열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로 이적하고 김성한이 은퇴하자, 많은 이가 ‘이제 해태 왕조는 끝났다’고 말했다.
야구천재 이종범도 1997년을 끝으로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진출, 해태는 큰 전력 손실을 떠앉아야만 했다. 게다가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IMF) 관리체제’는 해태, 쌍방울 등 재정이 취약한 구단들에 치명적이었다. 모기업인 해태제과의 자금난, 해태그룹의 계열사 해체 등의 소식은 시즌 내내 선수단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결국 해태는 1998년 61승 1무 64패로 5위로 마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임창용을 트레이드로 삼성에 보낸 1999년에는 마운드가 팀 평균자책 5.21로 무너지며 60승 3무 69패로 7위로 추락했다. 이 시즌에는 김상진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끝에 사망해 많은 이를 안타깝게 했다. 해태는 2000년 57승 4무 72패(4할4푼2리)로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결국 이듬해인 2001년 8월 1일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의 기아자동차가 새 주인이 되면서, 해타타이거는 19년 영욕의 역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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