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에서 기아로 바뀌었을 뿐…호랑이 정신은 그대로

[월요신문 오아름 기자] 2015년 3월 28일,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따스한 봄, 드디어 야구시즌이 찾아왔다. 올해는 KT 위즈의 가세로 10구단 체제가 꾸려지면서 경기수가 576경기에서 720경기로 144경기나 늘었다. 지난해 경기당 평균 관중인 1만1302명만 유치해도 올해 총 예상 관중은 813만7440명으로 8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있다.

10구단 중에서도 광주광역시에 연고를 둔 기아타이거즈는 광주는 물론, 전국 각지에 상당 수의 골수 팬을 두고있다. 프로 스포츠가 연고지 중심인만큼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전라도 사람이 많다는 방증이다. 비연고라하더라도 기아타이거즈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도 많다는 뜻이다.

   
서울 잠실야구장 3루에서 기아팬들이 승리를 위한 열정적인 응원을 펼치고 있다. 오아름 기자

“타이거즈 새롭게 인사드립니다”

해태타이거즈는 9번의 우승이라는 화려한 역사를 뒤로한 뒤, 2000년 57승 4무 72패(.422)로 창단 이후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이후 2001년 8월 1일 기아자동차에 인수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해태타이거즈는 기아타이거즈로 옷을 바꿔 입었다. 해태의 명장인 김응룡 감독 역시 2000년 시즌을 끝으로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자리에는 해태타이거즈의 스타급 선수였던 김성한 감독이 앉았다.

타이거즈의 이름과 전통을 이어받은 기아는 창단 초기부터 공격적인 팀 운영에 나섰다. 일본에서 프로야구 생활을 정리한 이종범을 포함해 매년 FA와 트레이드를 통해 거물급 선수를 영입했다. 기아는 용병 영입에도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고, 김진우와 한기주 등 신인 선수에게도 거액을 쏟아 부었다.
이는 짠돌이 구단으로 악명 높던 해태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전력을 집중적으로 보강한 결과, 기아는 2001년 5위에서 2002년 정규시즌 2위로 올라섰다. 이어 2003년과 2004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어쩌다 하위팀 됐을까?

기아는 포스트시즌에만 진출했을 뿐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고, 김성한 감독마저 선수 구타 논란 끝에 2004년 시즌 중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기아는 빠른 속도로 추락해, 2005년에는 팀 사상 최다 패인 76패를 당하며 창단 첫 최하위의 굴욕을 맛봤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2007년에도 또 한 차례 꼴찌로 추락했다. 당시 기아 팬들 사이에서는 하위권을 맴도는 세팀(엘지, 롯데, 기아)를 한데 엮어 ‘엘롯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야구 전문가들은 기아의 초기 투자가 선수 영입에만 신경썼을 뿐, 정작 야구장 환경이나 훈련 시설 등 물적 투자에는 소홀, 이 같은 결과를 자초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기아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해태 시절의 실내연습장인 호승관, 2군 연습장인 함평야구장 등의 시설에는 별다른 개선이 없었다.
 
이로 인해 기아는 거의 매년 “선수층이 얇다”는 평가에 시달렸으며, ‘경산볼파크’ 등으로 대표되는 활발한 물적 투자로 삼성이 2000년대 이후 단골 우승팀이 된 것과 자주 비교 대상이 됐다.

게다가 해태 잔재도 2000년대 기아의 발목을 잡은 요인이다.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전력에서 기아가 SK를 압도한다는 평이 주를 이뤘으나, 결과는 SK의 완승.

당시 SK 한 관계자는 “치밀한 전력분석을 통해 기아 선수들의 장·단점에 대해 훤히 꿰찬 결과”라고 귀띔했다. 반면, 해태 시절 승리 공식에 익숙한 기아의 코칭스태프는 전력분석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기아타이거즈, 12년만에 ‘V10’달성

기아는 2007년 조범현(現 KT위즈 감독)배터리 코치를 새사령탑으로 임명했다. 조 감독은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SK감독으로 기아를 무너뜨린 바 있다.

그는 광주일고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가 돌아온 서재응을 영입, 전력보강에도 의욕적으로 나섰다. 다만, 메이저리거 최희섭의 부진으로 기아는 시즌 내내 장타력 부재에 시달렸고, 마운드 불안도 여전했다. 시즌 최종 순위는 6위.
 
다만, 에이스로 성장한 윤석민의 활약과 군에서 복귀한 유동훈의 호투, 김선빈과 나지완 등 신인 타자들의 활약은 조 감독을 설레게 했다. 노장 이종범도 당시 .284를 기록하며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맞이한 2009 시즌 초반만 해도 기아의 전력은 불안했지만, 두 외국인 투수(로페즈, 구톰슨)가 호투를 거듭하고 LG에서 다시 데려온 김상현의 홈런포가 폭발하며 기아의 질주가 시작됐다. 또 윤석민과 양현종 등 토종 에이스들의 활약과 이종범의 부활, 최희섭의 맹타, 신인 안치홍의 활약도 기아의 선전에 큰 힘을 보탰다.

기아는 후반기 시작과 함께 선두권으로 도약했으며, 9월 내내 SK와 쫓고 쫓기는 1위 싸움을 벌인 끝에 시즌 1경기를 남긴 시점에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했다. 12년만의 정규시즌 1위다. 한국시리즈에서도 기아는 2년 연속 우승팀인 SK를 4승 3패로 꺾고 통산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를 수 차례 재패한 호랑이의 피가 어디 가지 않더라”는 전문가들의 평대로, 기아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내내 해태 시절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과 승부 근성을 보였다.

3승 3패로 맞선 가운데 열린 7차전은 현재도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국시리즈 최고의 명승부다.

기아는 중반까지 1-5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으나, 경기 후반 타선이 집중력을 보이며 5-5동점을 만든 뒤 9회말 공격에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MVP, 김상현은 정규 시즌 MVP가 됐다.

12년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선수단과 팬들의 염원인 인프라 투자로 이어졌다.

우승 직후인 2009년 10월 서영종 기아 사장은 전용 훈련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우승과는 별개로 이전부터 추진해온 일”이라는 기아 관계자의 말이다.

2010년 4월 27일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3군 운영을 시작했다. 기아는 이외에도 신인 스카우트, 외국인 스카우트, 자유계약선수 영입 등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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