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부터 민주화 항쟁, 촛불시위까지

[월요신문 김영 기자]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6월 10일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 서거에 맞춰 6.10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전두환 군사독재 말기였던 1987년에는 6월 항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초창기였던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관련 대규모 촛불시위가 거행되기도 했다. 지난 90여년 동안 세차례 이르는 큰 시위가 유독 이날에 맞춰 일어난 것이다.

   
순종 장례식 당일 주민 소동에 대해 출동해 있는 일제 군경.

1926년 6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 식민지정책에 변화를 가한 것은 물론 독립운동가 색출에도 열을 올렸고 그로인해 국내 독립운동 열기는 상당히 침체됐다.

국외 사정 역시 좋지 못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제역할을 못하고 있던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혁명 여파로 독립운동 역시 좌우대립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러가하면 만주일대서 위세를 떨치던 무장독립투쟁 또한 일본군의 대토벌작전 및 자유시참변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20년대 들어 국내외 독립운동 기운이 가라앚았던 것. 그나마 민족운동에 활력이 됐던 것이 학생운동이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재위 4년 만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순종이 1926년 4월 세상을 떠나자 국가 없는 설움에 허덕이던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순종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가 모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일제에서는 제2의 3.1운동을 우려 순종 장례식에 맞춰 경성(서울)에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는 등 경계를 강화했다.

그럼에도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순종 장례식에 맞춰 전국민적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그 중 기성세대의 시위 준비는 강화된 일제 검열에 걸려 중도 실패로 돌아갔고 일제 감시를 덜 받던 학생들의 시위는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맞춰 차근차근 진행됐다.

거사날인 10일 시위 시작을 알린 것은 중앙고보생 300명이었다. 이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에 격문을 뿌렸고 이후 연희전문학생 50여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학생 시위에 군중들이 합세했고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일제의 감시망이 두터웠던 탓에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 같은 전개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시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은 서울에서만 210여명 전국적으로 1000여명에 달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당시 시위에 대해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이자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한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라 평하고 있다.

   
6월 항쟁 이후인 7월 있었던 이한열 열사 장례식과 서울광장에 모인 군중. <사진제공= 뉴시스>

1987년 6월

1987년 6월 10일에는 반독재에 맞선 6월 민주화 항쟁이 시작됐다.

그해 6월 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및 이후 발표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 그리고 이어진 이한열의 시위 도중 최루탄 사망 사건 등이었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 군사정권을 이어가겠다는 야심을 굳히지 않았다. 임기 내내 학생운동권 중심으로 군사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화 시위가 진행됐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

1987년 1월에는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된 뒤 폭행 및 고문을 받다 숨지기도 했으나 당시 정부에서는 이를 축소 은폐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른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박종철 추모 시위가 있고난 뒤인 4월에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사회적 개헌 요구를 국력낭비라는 이유로 묵살했다.

5월 17일에는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이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분신 시도 후 사망했다.

그리고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이한열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7월 5일 사망)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6월 항쟁이 시작된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려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같은 날 전국 곳곳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시위는 보름 가까이 지속됐으며 더 이상 정부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노태우 당시 민주당 대표는 6·29 수습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이후 시위대는 해산했다.

6.10 항쟁에 대해서는 군사독재 종식 및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또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적 시민운동이 이 때를 기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됐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쇠고기 수입협상에 반대 촛불대행진 당시 모습. <사진제공= 뉴시스>

2008년 6월

이명박 정부 취임 첫해였던 2008년 6월에는 6.10 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서울 등 80여 시·군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시위가 촛불대행진 형태로 펼쳐졌다.

2008년 촛불시위는 그해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첫 집회때 구성원의 60% 이상은 여고생들이었으며 이후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며 정권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시위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시위는 6월 10일을 정점으로 이후 그 수위가 낮아졌으나 7월 이후까지 주말 집회는 계속됐다.

당시 시위대 규모가 상상이상으로 늘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정부의 소통부재 및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 등이 영향을 줬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가하면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내 보혁갈등이 좀더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는 의견 또한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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