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천신정’ 정풍운동의 핵심, 신당 창당의 중심으로

[월요신문 안재근 기자] 5선의 천정배 의원은 야권을 대표해 온 중진의원이자 차기 또는 차차기감으로도 거론되어 온 잠룡급 인사다. 그런 그가 지난 번 재보궐 선거에서는 탈당이란 초강수를 두고 당을 나갔었다. 친노(친노무현)그룹의 독단적 당 운영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호남 정치 복원이란 명분을 앞세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야권은 물론 정치권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 체제가 들어선 이유 끊이지 않고 있는 계파갈등 논란 속 천 의원 중심 신당 출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당 창당설의 중심에 서 있는 천정배 무소속 의원. <사진제공= 뉴시스>

최근 정치권에서는 전·현직 야당 의원들의 저녁식사 자리에 주목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 계파갈등 지적 속 비노(비노무현)계로 분류되는 이들의 식사 회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냐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론에서는 해당 자리에 천정배 의원이 참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광주 보궐선거 승리 후 그가 문 대표 체제에 대한 호남 민심의 대변 내지 친노계 실패를 방증하는 사례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야권에서는 천 의원이 탈당이란 강수를 두고 나선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후 그 주변에 호남계 야권 인사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그를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이 가시화 되지 않겠냐며 상황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레이스 경선 승리에 일조했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법무부 장관을 맡기도 했던 그가 이제는 친노계를 위협하는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영재 출신 변호사

1954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명색한 두뇌를 자랑했다. 중학생 시절 전라남도 학술 경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목포고등학교에는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 졸업했다.

1972년 대학예비고사에서도 그는 인문계 전국 수석을 차지하며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바둑기사 조훈현, 시인 김지하 등과 함께 ‘목포 3대 천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생 시절 그는 사법시험 1차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2차 시험에 응하지 않았고 대학 3학년때 다시 1차 시험을 본 뒤 1976년 졸업과 동시에 제 1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그는 판사나 검사가 되는 대신 공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이후 신군부 체제 아래 법관 임용을 거부하며 변호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1년 국내 최대 로펌으로 유명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입사한 그는 4년간 외환 무역 조세관련 국제변호사로 입지를 다지다 1985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을 나와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을 열고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맡은 최초의 시국사건은 1987년 대선과정에서 발생한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이었으며,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창립 멤버로 참여해 상임간사와 국제인권위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천정배 의원이 맡은 주요 사건들로는 1989년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리영희 교수의 방북사건과 가수 정태춘 사건 변론 등이 있다.

특히 그는 정태춘 사건 당시 헌법재판소로부터 ‘음반 사전심의제’위헌 결정을 이끌어내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다.

DJ가 발탁, 동교동계에게는 악몽

천정배 의원의 정계진출은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경기 안산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부터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그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경기 안산을(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또 그는 그 해에 민주당 수석원내부총무를 지내면서 자유민주연합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법안을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야당의 동의 없이 통과시켰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에는 현역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해 화제가 됐다.

천 의원이 정치권 전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2003년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며, 소위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이라 일컬어지는 당내 강경개혁세력으로 지칭되면서부터다. 이들은 민주당의 분당과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동교동계와는 상당한 악감정을 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천 의원은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며 그해 말에 4대 쟁점법안 처리를 주도하기도 했으나 해당 법안의 국회 통과가 실패하자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었다.

2005년 6월에는 법무부 장관에 임명돼 참여정부 내각으로 들어왔다. 장관 재직 시절 그는 강정구 동국대학교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 관련 검찰에 불구속 수사를 할 것을 요지로 하는 수사 지휘를 내려 파문이 일기도 했다.

당시 논란으로 김종빈 검찰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그의 소신이 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의원 활동 시절 그가 법무부 장관의 검찰에 대한 지휘권을 삭제하는 내용의 검찰청법 개정안을 제안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권 움직임 포착

2007년 1월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으며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예비경선에서 탈락했다.

이후 문국현과 함께 정책 토론회에 참석해 정책 연대를 구상하기도 하는 등 17대 대선 당시 제3의 후보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18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경기 안산시 단원구갑에 출마해 당선되며 4선 고지에 올랐는데 안산에서 4선 의원이 나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민주당 내 MB언론악법저지와언론자유수호특별위원장, 언론장악저지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 그는 18대 국회 당시 미디어법이 강행 처리되자 의원직 사퇴를 선언한 뒤 원외투쟁에 주력하다, 2010년 2월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해 유감을 표시하고 공식복귀를 선언했다.

2010년 10월에는 민주당 전당대회 지도부 경선에 출마 총득표수 5598표, 득표율 10.05%로 5위에 오르며 최고위원으로 뽑혔다.

MB정부 시절 천 의원은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 내지 “죽어서 이 악의 무리들, 탐욕의 무리들을 소탕하는 한해를 만들자”라고 비판하며 이슈를 만들어 내기도 했고 그로인해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서울서 실패 뒤 광주서 부활

2011년 8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사퇴하자, 천정배 의원은 즉각 서울시장 도전 의사를 밝혔다.

의원직까지 버리고 선거에 나선 그는 주소지도 서울 관악구로 옮겼으나 박영선 의원에게 당내 경선에서부터 패하며 본선에는 나서지도 못했다.

또 그는 19대 총선 당시 여당이 강세를 보여 온 서울 송파을에 출마했으나 46%의 득표율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천 의원은 한 동안 여의도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지내오다 광주로 내려갔다. 당내 계파갈등 속 호남정치 몰락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호남정치 복원을 내세워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천 의원은 광주시 광산을 공천에서 당 지도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권은희 의원이 전략공천되며 그가 배제된 것.

이에 그는 지난 4월 광주 서구을 재보궐 선거 때는 당 공천 참가 대신 탈당을 택해 야권 전체에 충격을 전해주기도 했다. 정동영 전 상임고문이 탈당 후 국민모임 합류라는 선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중진급 인사가 당을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과거 민주당 시절부터 새정치연합의 기득권이 유지되어 온 호남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며 본인이 가진 정치권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신당 창당에 무게감 실려

재보궐 선거 뒤 천정배 의원 주변에서는 꾸준히 그가 참여하는 신당 창당에 대한 여러 설들이 나오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진 않은 상황이다.

지난 5일에는 정의당과 국민모임 노동당 등이 결집한 진보정당 창당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천 의원의 경우 해당 정당으로 이동은 하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천 의원은 “제가 그 정당에 직접 참여할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제 임무는 야당의 맏형이라고도 불리는 새정치연합이 마땅히 해야 할 자리를 제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년 총선까지 새로운 세력을 모아 적어도 광주에서 만큼은 새정치민주연합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신당이 될지 무소속연대가 될지는 몰라도 새정치연합의 텃밭에서부터 혁신의 울림을 울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새정치연합 내 호남계를 대표하는 박지원 의원의 경우 천 의원의 신당 창당설 관련 “천정배 의원과 가까운 분들은 이미 사무실을 내고 활동하고 있다”며 이를 기정사실화 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천정배 의원은 명확한 얘기를 하지 않고 가능성만 말하고 있지만 제가 알기론 그렇다. 당에 가서 보고도 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이어 박 의원은 “당에는 4개 그룹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모두 알고 있다”며 새정치연합 내부에 분당과 신당창당 움직임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10여년 전 열린우리당 시절 천정배 의원. <사진제공=뉴시스>

학력

1966년: 암태국민학교 졸업
1969년: 목포중학교 졸업
1972년: 목포고등학교 졸업
197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LL.B.
198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2013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입학

경력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 합격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창립회원, 상임간사, 국제인권위원장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경기 안산을/새정치국민회의)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비서실장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특보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경기 안산을/새천년민주당)
2000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원내수석부총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정무특보, 대통령후보 직속 정치개혁추진위원회 총괄간사2003년: 열린우리당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2003년: 국회 정치개혁특위 간사
2004년: 열린우리당 총선기획위원장 ∙ 클린선거위원회 위원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경기 안산 단원갑/열린우리당)
2004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2005년: 법무부 장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경기 안산 단원갑/민주당)
2008년: 민주당 언론장악저지대책위원회 위원장
2010년: 민주당 최고위원
2011년: 민주당 개혁특위 위원장
2012년: 민주통합당 서울 송파구(을) 지역위원회 위원장
2014년: 법무법인 해마루 광주분사무소 변호사
2015년: 제19대 국회의원 (광주 서구을/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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