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개인의 능동적 삶을 위하여

김재홍 시인.

근래에 나는 나의 판단을 의탁하고 나의 행동마저 위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일상의 작은 일에도 누군가의 조언 없이 뭔가를 결정할 때에는 불안감을 느꼈고, 광우병 사태나 천안함 침몰, 세월호 참사와 같은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방송과 신문과 포털사이트를 통해 공급되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나의 판단과 내 행동의 근거를 찾았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며 내 신체발부의 당당한 오너인 내가 스스로 미지칭의 정보에 자신을 내맡긴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나는 없고, 나로부터 의탁과 위탁을 받은 불특정의 정보 공급자들은 드넓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이른바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포털사이트라는 강력한 전파 매체를 활용해 주체가 사라진 무주공산을 마음껏 쥐락펴락하고 있다.

넘치는 정보와 현란한 언어적 수사만 아니라 논거가 실종된 선동까지 횡행하는 일상 속에서 삶의 주체로서의 능동적 판단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는 고도 정보화 사회의 역설 가운데 하나로서 어느 때보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절박해진 사정을 반영한다. 자신을 찾고 자신을 지키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이상 ‘내 눈으로 세상 보기’를 미뤄선 안 된다.

한때는 분화보다는 총화가, 다양성보다는 총체성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던 때가 있었다. 대량생산과 박리다매의 수출 전략이 국가경제의 에너지원이 되던 산업화 시대의 기업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난을 면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생존 과제인 수많은 가정도 그러했다. 그러나 정보의 분출이 차별성과 개성으로 연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보 권력에 대한 맹종적 태도를 야기하는 세태 속에서 분화와 다양성에의 요구는 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다.

주체적 개인의 능동적 천변만화(千變萬化)에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해석된 정보의 범람이다.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의 실종’을 확산시키고 있다. ‘사실’은, 그것이 ‘사실’인 이상 물리적 한계를 넘어 절대치가 늘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해석’은, 그것이 ‘해석’인 이상 거의 무한대로 증가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망과 SNS 환경은 여기에 최상의 촉매가 되고 있다.

사실 관계의 확인과 검증을 거치지 않거나 미진한 개개의 ‘해석들’은 포털사이트와 SNS를 통해 삽시간에 공중(公衆)의 인터넷 망에 올라간다. 해석의 정당성과 책임감보다는 조회 수와 댓글에서 짜릿함을 훨씬 강하게 느끼는 키치적 욕구는 ‘해석들’의 확대재생산을 유발하고, 이는 곧 ‘나의 실종’의 원인균이 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판단 유보를 넘어 판단 자체를 의탁하고 행동까지 위탁하는 무수히 많은 사례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개인의 비주체성을 타박하며 그것에만 비판을 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군사독재와 폭압적 권위주의 시대를 벗어나 권력 자체가 다기화(多岐化)된 민주화 이후 생활인들이 겪는 왜소증과 눈치 보기를 함께 지적하는 것이 옳다.

특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갑작스런 대형 사고나 사건의 경우, 사람들은 황급히 다수 의견과 지배적 여론을 찾는다. 그리하여 자신이 택한 입장이 가급적 보편적 지평에 있기를 원한다. 공공의 적이 사라진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생활인들의 주체성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대치선(對峙線)이 모호해진 조건에서 어디서 어떻게 당할지 모를 비판과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정보 소비자인 생활인들이 주체성 상실의 위기에 봉착한 데에는 정보 생산자의 무책임한 ‘해석들’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앞서 한 바와 같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사실관계를 뒤바꾸고 호도해서라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가치전도의 덫이다. 정파와 집단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의적으로 주창하는 굴절된 외침들이 부지불식간에 판단 의탁을 종용하고 있다. 실재보다는 특정 목적 달성을 절대시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념적 편향이며 주체적 판단을 가로막는 폭력이다.

주체적 판단이 실종되면 행동하는 내 몸의 주체성까지 사라진다. 드높이 휘날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허겁지겁 달려가는 나는, 그러나 ‘내’가 아닌 ‘너’일 뿐이다. 또한 대개 이런 깃발들은 가까이서 보면 찢어진 깃발이기 쉽다. 세계 이해와 판단에 있어 이념의 그늘에 갇혀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 행동을 원치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적 개인이 있어야 참다운 공동체가 성립된다. 판단을 의탁하고 행위를 위탁하는 주체 실종의 사회에는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나’가 사라진 ‘우리’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나’가 아닌 ‘우리’에 빠지는 순간 헤어나기 어려운 집단의 굴레에 갇힌다. 이런 유형의 ‘우리’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내 눈으로 실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식적 생활이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들어 나는 스스로에게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도 정보화 사회의 역설 속에서도 자기의 눈과 귀와 입과 코로 세상을 보는 것은 고유한 인식과 주체적 판단과 능동적 행동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기만의 독자적 읽기를 주문하며 문학 이해의 주체성을 강조한 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지적은 표의를 넘는 깊은 통찰의 소산이다.

“제 나라 동시조차 변변히 해독하지 못하는 터전에서 조금 복잡한 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또 그러한 독서능력마저 갖추지 못한 터수에 문화배경도 다르고 말도 생소한 외국시를 배우고 엘리엇이나 보들레르에 관한 기말논문을 써내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이다.”(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 경험의 시학>, 민음사, 1995.)

나는 어디 있는가. ‘나’가 사라진 ‘나’ 부재의 시대, ‘나’ 상실의 시대에 내가 있다. 나는 ‘나’가 아니라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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