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지난달 29일 미국 재무부는 한국, 중국, 일본, 독일, 대만 5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지정했다.

미국 무역촉진법(BHC 수정법안)이 정한 환율조작국 지정 기준은 △연간 대미 무역흑자 200억 달러 초과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3.0% 초과 △외환시장에 대한 지속적인 일방향 개입(연간 GDP 대비 2% 초과 순매수) 등 세 가지다.

환율조작국가로 지정되면 통상 및 투자 제재가 가해진다. 해당국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투자가 제한하고, 해당 국가의 기업들이 미국 내 조달 시장에 참여하는 것도 제한을 받는다. IMF와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한국은 대미 무역흑자와 경상수지 흑자 잣대에는 걸렸지만 외환시장에서 지속적인 일방향의 시장개입은 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돼 환율조작국 지정은 피했다.

<자료출처=기획재정부>

미국 재무부는 이번 보고서에서 “한국은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 현저한 무역흑자와 상당한 경상수지흑자를 기록했다. 2015년 대미 무역흑자는 258억 달러, GDP 대비 경상흑자 비율은 7.7%다”라며 “중기적으로 원화 절상이 한-미간의 수출 편중 구조를 바꾸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재무부는 이어 “외환시장 개입은 무질서한 시장 환경 발생 시로 제한하고 외환운용에 대한 투명성을 제고할 것”을 권고했다.

지속적 일방향 시장개입과 관련해서는 “한국은 지난해 GDP 대비 0.2%의 순매수(27억5천만 달러, 약 3조1천억원)를 한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2015년 하반기에서 2016년 3월 사이에는 원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260억달러(약 30조원)의 매도개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난 수년간 원화절상을 막기 위해 개입한 것과 대조적이었다”고 말했다. 작년 하반기 이후 대대적인 매도 개입이 없었다면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도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변동환율제도하의 외환시장개입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환율을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환율은 기본적으로 외환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환율시장에 개입한다. 환율을 시장에만 맡겨둘 경우 단기차익을 노린 국제투기자본에 의해 환율이 불안정해져 경제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환시장개입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환율이 급등(달러가치 급등, 원화가치 급락)할 때는 달러를 팔아 지나친 환율상승을 제어하는 매도 개입이 이뤄진다. 한국과 같은 수출주도국가는 대체적으로 환율상승이 유리하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이 많아지고 수입은 감소해 경상수지가 개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율이 단기간에 급격히 상승할 경우에는 주가급락과 물가급등으로 내수경제가 침체될 수 있다. 따라서 환율 급등 시에는 달러가치에 비해 원화가치가 급락하는 것을 막는 원화절상이 개입 목적이다.

반대로 환율이 급락(달러가치 급락, 원화가치 급등)할 때는 달러를 사들이는 매수 개입이 이뤄진다. 환율이 급락해 달러가치에 비해 원화가치가 지나치게 올라가면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외환당국이 달러를 사들여 시장에서 달러가 줄어들면 일시적으로 환율이 상승한다. 이 경우는 원화 절하가 개입목적이 된다.

‘환율조작국’ 카드 꺼내든 미국의 속내

현재 미국의 표면적 불만은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지정된 국가들이 환율을 시장자율에 맡겨 탄력적으로 운용하지 않고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역상대국들이 달러 대비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상승을 막는 형태로 시장에 개입한 결과 미국을 상대로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와 무역흑자를 냈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4개국은 미국 무역수지 적자의 63%를 차지하고 있다”며 외환시장개입에 의한 약세 저지 및 절상압력을 가하는 형세다.

이와 관련 잭 루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달 16일 일본에 대해 “세계 경제가 침체국면에 빠져있다. ‘이웃 나라 거지 만들기’ 환율 정책은 피해야 한다. 특히 경상수지 흑자 국가들은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그러나 수출경쟁력 강화를 위해 각국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환율의 약세를 유도했다고 보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 전 세계가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상황에 진입해 있는데다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주요 기업들의 경우 글로벌화가 진행된 상태라 환율이 경쟁력의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러면 미국이 ‘환율조작국’ 카드로 압박해 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미국 재무부의 환율보고서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조기비준 반대론을 달래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해 10월 타결된 TPP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요 대선주자들이 TPP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고 있어 올해 안에 미 의회 비준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시아 국가들이 환율에 손을 대 자국 제품을 유리하게 팔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환율 조작에 강경한 자세를 보여 TPP 반대론자들을 누그러뜨린 뒤 조기 비준을 얻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오바마 정부는 의회에 명분을 주면서 ‘임기 내 비준 처리’라는 실리를 챙길 수 있게 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지난달 30일자 보도를 통해 “환율 보고서에는 미국 행정부가 TPP 비준을 위해 의회를 설득하려는 목적이 담겼다”는 분석을 내놨다.

한편 미국의 이번 조치가 환율주권 침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LG경제연구원 배민근 연구위원은 “과거 원/달러환율의 흐름을 보면 짧게는 1개 분기에서 길게는 2~3년까지 한 방향으로 쏠린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일방향 개입을 할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일방향 개입시 무조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는 것은 환율주권 침해다”라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 역시 “국제통화기금(IMF)도 각국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한 미세조정 권한을 인정했다. 미국이 교역대상국들의 외환정책에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측면이 있다.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한곳으로 쏠릴 때는 외환당국의 개입이 인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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