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연재를 마치며

김재홍 시인.

시(詩) 얘기를 하려고 한다. 시인으로서 지난 석 달 동안 세상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했으니 그 마지막 언사로 시를 다루는 것도 좋겠다. 시란 형식은 양식적 제약과 시대적 압력을 받기 마련이지만, 시가 다루는 세계는 현세 간의 영역도 초월적 존재도 될 수 있는 무한정이므로 ‘시 얘기’는 결국 한 분야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현재주의(presentism)는 오늘의 기준으로 과거의 공과를 논한다는 점에서 오류 가능성이 높으며, 때에 따라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진정한 현재주의는 오늘의 관점에서 오늘을 기록하고 오늘의 공과를 논한다.”

지난 2013년 발간한 두 번째 시집 <다큐멘터리의 눈> 뒤표지에 나는 우리 시의 특정 양상을 염두에 두고 위와 같이 적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개된 눈앞의 현실에 날카롭게 천착하지 않는 퇴행적 시단 분위기를 지적하고자 했다. 이는 또한 시인으로서 어떤 시세계를 지향하는지 밝히는 일종의 다짐이기도 했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진 생물학적•생태학적 축복 이래 수만 년 전통에도 불구하고 시는 무슨 대단한 예술이 아니다. 살며 사랑하며 아쉬워하고 분노하고 공감하는 모든 것, 그것에 자신을 내맡겨 그것과 함께 그것이 되고자 하는 게 시다. 그러니 시는 고고하기보다 저속하고 장대하기보다 소소하고 화려하기보다 수수하다. 시는 사람 편에서 사람살이를 응원하는 눈에 뜨이지 않는 시종이다.

시인은 더 대단하지 않다. 자기 눈으로 본 것, 자기 마음으로 읽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일 뿐이다. 시인은 자극에 반응하는 사람이지 자극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시인도 모티프를 제공하는 전제 없이 시를 적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수동적이고 감각적이며 표현주의적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시인은 현실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한다. 시시각각 전개되는 세계의 양상에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온 몸을 던져야 한다. ‘깨어 있는 시인’의 시는 어떤 경우에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세상과 함께 세상이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시인’은 공상이나 몽상 속에 있지 않고 속세의 엄혹한 현실 속에 있다.

“시를 사랑하는 것은, 시를 생산하는 사람보다도 불행한 일이다.”라고 했다. 서정주(1915-2005)의 첫 시집 <화사집>(1941) 발문에 김상원이 적은 기록이다. 약국을 운영하며 시를 적기도 했다는 그는 또 “혹或이 일컬어, 시인의 비참한 생애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선물이라 하나, 어찌 사랑하는 자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어져가는 분신을 손 놓고 보게만 하는가.”라고 했다.

시와 시인, 시를 읽는 독자와의 관계를 적실하게 표현한 말이다. 현실에 착근된 시인은 그 현실의 바깥에서 음풍하거나 농월하지 않는다. 현실 속을 파고 들어가 현실이 되어 현실의 목소리로 시를 적는다. ‘시인의 비참한 생애’는 이와 같은 사정의 표현이다. 이렇게 탄생한 시를 사랑하는 ‘불행한 독자’는 한 편의 감동에 내재된 ‘비참한 시인’을 목도하면서 자연히 그 불행에 공감하며 그것을 넘어설 힘을 얻는다.

한용운(1879-1944)은 시집 <님의 침묵>(1926)에 굳이 ‘군말’을 적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중생은 석가의 님이고 철학은 칸트의 님’이라고 했다.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선사(禪師)는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했다. <님의 침묵>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갈망의 시편이 아니라 세파를 견디며 살아가는 기룬 사람들을 위한 시집이다.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 역시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지옥에서 보낸 한철> 중 ‘헛소리2’)라고 했지만, 시인이 결코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세상을 향해 깨어 있는 그 눈과 귀와 온 몸으로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하고, 기룬 모든 것을 님으로 위하며,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는 대신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바로 오늘’을 차갑게 직시하지 않는 일부 시인의 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큰 불만이다. 이들은 한편으로 자연 대상에의 감정이입을 뼈대로 하는 전통 서정시의 품안에 머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몽매한 독자에 대한 계몽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무와 풀과 바람에 감정을 투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비유와 통찰로 이룩된 아름다운 서정시는, 그러나 오늘의 실상에 대한 치열한 응시가 아니며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로 상처 받은 영혼을 유혹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 같이 속 좁은 전통 서정시의 유혹은 세계 독자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서정시의 양식적 외연 확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계몽의 욕망 또한 시인 된 자의 참다운 영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이 해석한 세계를 독자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과 의지를 반영하게 되고, 바로 그 자의성 때문에 독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비록 계몽의 욕망이 자연스러운 발심이라 하더라도 세계를 응시하는 깨어 있는 시인은 그 세계를 보여 주는 데 만족해야 한다.

“과도한 해석과 그에 기초한 계몽의 욕망은 자신이 딛고 있는 터전을 냉혹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기록해야 할 시인의 본분은 아니며, 설사 그렇게 시를 쓴다 해도 더욱 냉혹하고 차가운 진정한 현재주의자들의 평가를 견뎌내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섣불리 해석하려 하지 않고, 계몽의 그물로 짐짓 세상을 구제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눈앞의 현실을 진실의 심안으로 기록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다.”(시집 <다큐멘터리의 눈> 뒤표지 글 중)

그 동안 나는 일관되게 허상이 아니라 실상을, 이념이 아니라 실질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는 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는 결코 현실과 괴리된 공허한 상상의 소산이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차갑고 냉혹한 현실 인식 위에 서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야만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하고, 기룬 모든 것을 님으로 위하며, 상처 받은 영혼을 달래는 대신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 무슨 대단한 염력이 있어 이 험한 세상 구제할 수 있을까만, 오직 진실을 기록하고 그 앞에서 충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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