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파이낸셜타임스>

[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미국이 EU를 비롯한 WTO 회원국들로부터 세계무역기구(WTO)의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장승화 WTO 상소위원의 연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들도 “미국 정부가 중국과의 무역전쟁 준비 및 보호무역주의 강화를 위해 정치적 개입에 나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지난 30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WTO 회원국에 장 위원의 연임을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와 관련 “미국이 관련된 소송 3건 등에서 WTO 상소위원들의 결정은 추상적이었으며 도를 지나쳤다”면서 “상소기구는 위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주제를 선정해 추상적인 논의를 펼치는 학술단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WTO의 상소위원은 7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임기는 4년이다. 회원국이 모두 동의할 경우 1차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 2012년 6월 1일 한국인 최초로 상소위원으로 선임된 장승화 위원의 임기는 지난달 5월 31일까지다. 통상적인 관례로 볼 때 장 위원 역시 연임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장 위원의 연임은 좌절된 상황이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회원국들은 장 위원의 연임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장 교수를 반대하는 이유는 4건의 판결 때문이다. 장 교수가 내린 4건의 결정 중 3건은 미국이 제기한 소송이다. 소송 결과 미국에 불리한 판단이 연달아 나오자 미국 측 불만이 누적됐다”고 분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또 “미국이 최근 한국산 세탁기에 대한 반덤핑 분쟁에서 패소해 WTO 상소 절차에 돌입했는데 장 교수가 연임하게 될 경우 불리한 결정이 나올 수 있어 사전에 차단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장승화 위원의 상소기구 연임을 거부한 것을 두고 “보호무역주의가 확대되고 있다는 단적인 사례”라는 지적도 나왔다. 미국이 말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자유무역협정(FTA) 등 자유무역 확대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장승화 위원에 대해서는 자국의 무역에 불리한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이유로 연임을 반대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연임 반대는 WTO 상소기구가 중국에 ‘시장경제지위’ 결정을 앞두고 나온 것이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시장경제지위란 정부의 간섭 없이 시장에서 원자재 가격이나 임금, 환율, 제품가격 등이 결정됨을 상대 교역국이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이 시장경제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덤핑판정 시 자국 내 원가를 인정받지 못해 패소 확률이 높고, 고율의 반덤핑관세를 부과 받게 된다. 반면 시장경제지위를 획득할 경우 중국은 미국이나 EU가 부과하는 반덤핑 관세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시장경제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이에 따라 중국과 통상 분쟁 중인 미국이 상소위원의 연임에 제동을 걸면서 상소기구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최근 중국 철강회사를 상대로 한 미국의 관세폭탄 부과는 이 같은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중국산 냉연강판에 522%, 내부식성 철강제품에 최대 451%의 반덤핑관세를 각각 부과키로 했다. 사실상의 수입 금지령이다. 이에 중국은 WTO에 제소하겠다며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캘리포니아대 그레그 섀퍼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행동은 순수하게 법적으로 처리돼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정치를 주입시킬 위험이 있다”면서 “이는 미국을 마치 약자를 괴롭히는 불량배처럼 보이게 했다”고 비판했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보도를 접한 미국의 한 네티즌은 장승화 위원 연임 반대와 관련 “미국은 '세계무역기구'를 '미국무역기구'로 착각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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