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국민연금>

[월요신문 허창수 기자] 지난해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외압과 로비 등에 의해 찬성 의결권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확산되면서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체계를 보다 투명한 방식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국민연금의 불투명한 기금운용체계와 의결권 행사에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합병안 처리 방식 및 절차의 문제가 지목된다. 삼성물산 합병 한 달 전인 지난해 6월 국민연금은 SK와 SK C&C의 합병 반대를 결정한 바 있다. 당시 국민연금은 합병안 처리를 국민연금의 주주권(의결권) 행사 민간 자문기구인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맡겼다. 하지만 한 달 뒤인 지난해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 처리는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소속 투자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동일 사안에 대한 처리 방식을 달리 한 것이다.

기존에는 주식 의결권 행사 소관 부서인 책임투자팀이 △찬성 △반대 △전문위 부의라는 1차 의견을 투자위원회에 제시하고 투자위는 그 의견을 대체로 수용해 왔다. 하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전 기금운용본부 실무진은 책임투자팀이 1차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투자위원들이 △찬성 △반대 △중립 △주총 불참 △표결 기권 등 5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기준을 변경했다. 여기서 ‘표결 기권’은 전문위 안건 상정을 의미한다. 이같은 변화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7월 10일) 투자위원회 표결 결과는 찬성 8표, 표결기권 3표, 중립 1표로 합병안 가결 요건인 과반수 7표를 충족했다.

이와 관련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삼성물산 합병 전인 지난해 6월 SK와 SK C&C 합병안을 전문위에 넘겼는데 당초 예상과 달리 전문위가 반대 의견을 내놨다”면서 “기금운용본부가 합병안 처리 방식 관련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은 국민적 관심사로 등장한 삼성물산 합병 찬반 결정에 엄청난 부담을 느낀 팀장급 실무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성격도 있었지만 전문위가 합병안을 처리할 경우 반대 의견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또 삼성물산 합병 찬성 직전인 지난해 7월 1일 투자위원회 기업투자팀장을 외부 영입 인력으로 채우는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기금운용본부 안팎에선 “홍완선 당시 본부장이 삼성물산 합병 결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기존 팀장을 내보내고 측근 외부인사를 영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관련법 개정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지난 6일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 관리와 운용에서 독립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제출했다”고 발표했다. 제출된 개정안에는 △국민연금 이사장과 기금이사 임면 시 국회 인사 청문 △기금이사의 자격 강화를 통한 전문성 제고 △전문위원회 설립 근거 법정화 △기금 운용과 관련된 중요 회의의 회의록 작성 및 공개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와 관련 제 의원은 “국민연금이 삼성 그룹의 합병을 거들며 적게는 580억원, 많게는 3,150억원 정도의 손해를 봤다”면서 “이같은 국민연금의 결정은 연금 재원의 손익 문제를 넘어 공공 재원이 재벌 일가의 사익을 위해 이용될 가능성이 드러난 심각한 사건이다. 국민연금이 투명하게 운영·관리될 수 있도록 법적 의무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승희 새누리당 의원도 지난 22일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외부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주식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주주권행사 전문위원회’로 개편해 법적 기구로 격상하는 게 골자다. 또 기업 합병건과 같이 중요한 사안은 반드시 주주권행사 전문위원회에서 심의·승인하며, 그 세부내용은 외부에 공개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 김 의원은 “국민연금기금 운용을 견제·감시하기 위해 도입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면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 동안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2만5000여건의 안건 중 전문위에 부의된 안건은 총 14건에 불과하다. 외부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전문위원회를 실효성 있는 법적 기구로 재편하고 심의 기능을 강화해 의결권행사 절차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를 외부에 맡기거나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 관계자는 “현재도 정부의 입김이 의사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는 상황에서 의결권행사를 법제화할 경우 그 결과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면서 “자칫 정부의 기업경영 개입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최종 결정에 전혀 책임지지 않는 외부 민간위원들이 포트폴리오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김승희 의원실 관계자는 “의결권 행사 구조 측면에서 국민연금과 해외 주요 연기금들의 가장 큰 차이는 해외 연기금들의 경우 내부 직원들의 결정만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라며 “외국의 경우 독립성과 전문성이 모두 보장되든지 아니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보장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세계 최대의 공적 연기금인 일본의 ‘후생성연금보험 및 국민연금’(GPIF)의 경우 GPIF 내 설치된 기금운용위원회는 장기 주주가치 극대화 추구라는 기본 지침만 제시할 뿐 모든 주식투자 의결권 행사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개별 위탁운용사가 보유하도록 하고 있다. 대신 위탁운용사는 의결권행사 세부 가이드라인을 제정해야 하고 GPIF에 정기적으로 의결권 행사 내역을 보고할 의무를 진다.

세계적 연기금 중 하나로 꼽히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 연금(캘퍼스)의 경우 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와 비슷한 ‘관리이사회’가 존재하지만 관리이사회는 의결권행사 가이드라인만 제정할 뿐 최종 의사결정은 캘퍼스 내 주식운용실 소속 CG(Corprate Goverance)팀이 담당한다. CG팀은 매 분기마다 의결권 행사 내역을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캐나다 공적연기금(CPP)의 경우, 우리나라 기금운용위원회와 같은 캐나다연금투자이사회(CPPIB)를 두고 있다. CPPIB는 주로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반면 실질적인 의결권행사는 지속가능투자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위원회가 이사회의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사안별로 특수성을 고려해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겠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다른 공적 연기금과 마찬가지로 위원회는 분기별로 투자 진행 상황을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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