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머리 손질하며 아픔도 어루만져요”

경남 산청군 산청읍 김해이용원 김태식 이발사 <사진=월요신문>

[월요신문 권현경 기자] ‘착한’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인터넷에서 이 단어를 입력해보라. 우선 그 종류에 놀란다. 착한 가격은 기본이고 착한 고기, 착한 가게, 착한 기업, 착한 낙지, 착한 돼지, 착한 짬뽕, 착한 떡, 착한 연애, 착한 농부….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것은 대중이 이 단어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당하고 살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엔 나쁜 이도 있지만 착한 사람도 있다. 날로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 착한 이웃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 본지는 <우리동네 착한 이웃> 첫 번째 순서로 김태식(69) 이발사를 만났다.

김태식 옹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세시간 남짓 타고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도착해 김해이용원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흰 가운 차림의 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쳐다봤다. 69세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동안이다.

이발소 안을 둘러보니 상장과 표창장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역사회 봉사상으로 도지사 상장만 10여개에다 보건복지부장관상과 국민훈장동백장, 각종단체에서 받은 자원봉사상이 그득하다. 이발사가 어떤 연유로 이렇게 많은 상을 받았을까.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것을 남겨주지 못했지만 봉사로 살아온 삶 하나는 남길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김 옹의 답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음은 김태식 이발사와 일문일답이다.

봉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15살 때 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간병을 맡았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 이발을 시켜드리고 싶었지만 어디 부탁할 때가 없었다. 17살 때 부산으로 일자리 찾으러 갔다가 이발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아버지 머리를 직접 손질해 드리고 싶어서였다. 이후 산청으로 돌아와 이발소를 열었다. 그 때는 워낙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 도움을 청하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발소로 찾아오는 한센 환우를 비롯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불편해할까봐 영업시간 이후에 다시 오라고 해서 머리를 잘라주고 목욕비를 쥐어줬다.

봉사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나.

성심원(한센인 생활시설), 성심인애원(중증 장애인시설), 노인요양시설(복음전문요양원, 성모고려요양원) 등 일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정기 방문해서 이발을 해드리고 있다. 요즘 고령뿐 아니라 지체장애·정신장애와 같은 장애를 가진 젊은 사람도 많은 편이다. 혼자 갈 때도 있고, 시간이 되는 친구나 후배들과 함께 갈 때도 있다.

한센인들을 이발해주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혼자서 그 일을 다 하시나.

군청 직원이 성심원에 있는 한센인들이 사회에 나와서 머리를 할 수 없어서 어려움이 있다고 귀띔을 해줬다. 막상 가보니 그 당시에는 400~500명 정도 생활하고 있어서 혼자서는 어려움이 있었다. 주변 이·미용협회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 회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게 쉽지 않았다. “한센인을 대상으로 봉사해보니까 그 사람들도 똑같았다. 도움 받은 사람들은 우리의 행복을 기도해 주기도 하더라. 몸은 비록 불편하지만 영혼은 맑고 깨끗하다는 것”을 주변 회원들에게 강조했다. 1년 가량 회원들을 설득해서 봉사팀을 조직했고 같이 활동을 하게 됐다.

일요일마다 봉사활동을 가면 가족들의 불만은 없으신지.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오히려 “이번 주에는 어디 봉사 가세요?” 하고 아이들이 묻는다. 아내도 목욕, 청소, 돌보미 같은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지리산 등 명산이 많은 산청에 살면서도 아직 등산 한 번 가본 적 없고 가족들과 제주도 한 번 못 가봤다. 35년간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봉사하다 보면 어려움도 많을텐데.

노인들이 휠체어 타고 이발을 하러 나온다. 자세도 바르지 않고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마무리해야한다. 그래서 두 세 명이 동시에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치매 노인들은 머리를 만지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서 팔을 할퀴거나 침을 뱉고 욕하는 등 강하게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휠체어를 타지 않더라도 몸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허리를 구부리거나 무릎을 꿇고 이발을 해야 하기도 한다. 최근에 정책적으로 요양원이 많이 생겼다. 이·미용 봉사는 기술이 없이는 봉사를 할 수 없어서 요청이 오는 곳이 많아지는 추세다. 일요일만 가지고는 손이 부족해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 방문하기도 한다. 봉사를 갈 때는 빈손으로 못가고 우유나 음료라도 사들고 간다. 선풍기나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여겨봤다가 가는 길에 사다드리는 편이다. 그런데 매번 가다보니 마음은 있지만 늘 해드릴 수 없어서 아쉽다.

봉사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20년 전, 세 남매를 만났을 때다. 아버지가 빵을 훔쳐 먹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아이들만 남아있게 된 것을 알게 됐다. 이 아이들을 이발소 근처로 데리고 와서 아버지가 출소 때까지 1년 동안 생계를 보살폈다. 당시 제일 큰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그들에게 계속 무료 이발을 해줬다. 그 가족이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2012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주위 반응은 어떠했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기부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금전적 기부는 정기적으로 계속하기가 어렵다. 훈장을 받았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상금을 받았을까 하는 관심과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시상금으로 받은 것은 대부분 다 기탁하거나 필요한 단체에 기증했다.

봉사 활동 외에 주로 하시는 일은.

내가 만나는 분들은 소외계층이다 보니 외로움을 많이 탄다.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2~3곡이라도 연주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어 최근에 섹스폰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올해 69세인데 언제까지 봉사하실 계획인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계획이다. 봉사라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한다. 35년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봉사에 대한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것을 남겨줄 순 없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봉사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남길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 이것이야 말로 재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봉사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봉사를 위해선 ‘봉사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오늘은 몇 명 이발해주고 온다 등 목표나 목적을 정해두고 임하면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오래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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