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유승민, 홍준표, 김관용 <사진=뉴시스>

보수의 텃밭인 대구·경북(TK)마저 보수 정당을 외면했다. 지난 20일 발표한 중앙일보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안희정 후보가 각각 26.1%와 21%의 지지율로 접전을 벌였다. 반면 자유한국당 소속 홍준표 후보는 15.8%의 지지율로 3위를 기록했고, TK 적자를 자처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5.8%의 지지를 받는데 그쳤다.

정당별 지지율도 민주당이 31%로 자유한국당(17.4%)과 바른정당(9%)을 압도했다. TK가 지난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에게 80%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사실을 감안하면 '경천동지'할 정도의 변화다. 반면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돌파구를 찾아야 할 보수 진영은 때 아닌 TK적자 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모양새다.

 

◆유승민,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적극

3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며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는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에 맞선 보수진영의 대응책은 후보 단일화다. 후보 단일화는 역대 대선에서 꾸준히 추진된 카드이기도 하다. 1997년 DJP 연합,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등이 대표적이다.

단일화 논의에 가장 적극적인 세력은 바른 정당이다. 특히 바른정당은 당과 대선주자 지지율이 모두 저조한 상황에서 대선 이후 당의 운명을 위해서도 후보 단일화를 위해 적극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바른정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유승민 의원은 한국당내 친박계에 대한 정리가 이뤄지면 한국당 후보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유 의원은 당초 비박계인 김무성 의원을 등에 업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할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당내 약한 지지기반과 ‘배신의 정치’란 프레임에 빠져 지지세 확장에 실패했다. 여기에다 ‘TK 적자’를 자처하고 나서면서 중도와 온건 진보 세력을 흡수하는 데에도 실패했다는 분석이다. 이를 두고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은 “(유 의원은) 이상하게 TK 권력의 적자라는 자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것 같다”며 “본인의 움직임에 따라 얼마든지 정계의 모양이 바뀔 수 있는데 TK에서 못 빠져나온다. 그런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PK출신 홍준표, 대구 서문시장 찾아

이런 상황은 다른 보수 대선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불출마 선언으로 자유한국당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른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TK적자 경쟁’에 가세했다. 홍준표 도지사는 지난 1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대구에 와서 출마 선언을 하는 이유는 제가 TK 적자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영남 민심의 척도로 통하는 서문시장은 대권가도의 필수 코스를 넘어 보수의 성지로 불린다.

홍 도지사가 서문시장에서 대선 출마를 한 이유는 정치적 상징성 뿐만은 아니다. 홍 도지사는 경남 창녕 출신이지만 대구의 영남중·고를 졸업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피는 PK(부산·경남) 정서는 TK‘라고 표현한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경남고)와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부산고)가 각각 출마를 선언하며 부산의 진보 지지층이 쪼개졌다. 이런 가운데 부산 출신인 김무성 바른 정당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따라서 TK 보수층을 흡수하면 홍 도지사가 범보수 후보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홍 지사는 친박계가 아닌 친이계(친이명박)로 분류된다. 친이계와 가까운 김무성 의원과는 15대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나란히 국회에 입성해 18대 국회 때까지 함께 여의도에 머문 인연도 있다. 이 때문인지 두 사람은 지난 15일 비공개로 만나 범보수 후보 단일화에 대한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 경선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홍 도지사는 대선이 ‘진보 2명-중도 1명-보수 1명’의 4자구도로 전개되면 범보수 진영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김무성 의원도 평소 ‘친박’과 ‘친문’ 세력을 제외한 모든 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따라서 보수진영에서 지지율 1위이면서 자신과 가까운 홍 지사의 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하지만 한국당의 행보를 감안하면 단일화가 성사될 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한국당은 오히려 바른 정당과의 TK 적자 경쟁에 주력하는 모양새다.

 

◆인명진과 김관용 ‘通’했나

지난 2월 한국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은 대구 지역 핵심당원 3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관용 경북 도지사를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인 비대위원장은 “우리 당이 정말로 어려울 때 김 도지사님께서 비대위 상임고문을 맡아주셨다. 우리 당의 중심을 잡아주시고 우리 당을 오늘까지 잘 이끌어주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또 당이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제가 감사의 절을 드렸다”고 밝혔다.

윤재옥 대구시당 위원장도 파산직전의 당이 다시 일어선 것을 김 도지사의 공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윤위원장은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탈당 인사들을 겨냥해 “함께한 사람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비정한 보수를 따뜻한 보수라고 할 수 있나. 대구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보수 적통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다짐했다.

김관용 도지사는 큰절로 화답하며 “인 비대위원장이 절을 한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결기에 찬 모습 존경한다”며 “(인 비대위원장과)뭔가 오고 간 것이 있었다. 한국당에서 저의 책임이 무겁다”라고 말했다.

김 도지사는 유력 대선 후보 중 한명으로 현재 당내 경선 본선에 진출한 상태다. 김 도지사의 전국적 지명도는 낮다. 하지만 최초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6선(구미 시장 3선·경북 도지사 3선)이란 대 기록을 갖고 있는 김 도지사의 중량감은 TK인사들 중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1942년생인 김 도지사는 1995년에 민선 1기 구미시장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을 했고, 2006년 민선 4기 경북도지사에 당선돼 3선에 성공했다. 이로써 전국 최초 민선 6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지방자치 역사의 산증인으로 우뚝 섰다. 특히 2006년 선거에서는 전국 1위 득표율(76.8%)을 기록했다. 민선 5기와 6기 선거에서도 각각 득표율 75.3%와 77.7%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TK에서는 ‘행정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출생지(구미), 출신교(대구사범학교)가 겹칠 뿐만 아니라 새마을 운동의 국제화에도 힘을 쏟는 등, TK내 전통 보수 지지층의 결집을 이룰 수 있는 최적임자란 평가다. 이 때문에 김 도지사의 대선 등판은 결국 ‘텃밭 지키기용’이란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자객 꽂은 한국당

한국당이 TK에서 바른 정당과의 보수 적통 경쟁을 벌이는 정황은 또 있다. 한국당은 지난 2월 12개 지역구 조직위원장들을 임명했다. 이 가운데 유승민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의 조직위원장에 이재만 전 대구동구청장을 임명했다. 이 전 동구청장은 20대 총선 당시 “배신의 정치를 응징하겠다”며 유 의원을 향해 출사표를 던졌던 인물이다.

당시 유 의원이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뒤 새누리당 공관위가 이 전 구청장을 단수 추천했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의 옥새투쟁으로 공관위 결정은 뒤집어졌었다.

한국당은 또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을에 이인선 여성상임전국위원을 조직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지난 총선에서 수성을을 두고 격돌한 바 있다.

당시 새누리당 공관위는 대구 수성을을 여성우선추천지역으로 선정하며 이 위원장을 공천했다. 주 원내대표는 이에 극렬 반발하며 새누리당을 상대로 법원에 공천 무효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인용결정을 내리면서 이 위원장의 공천은 취소됐다. 이후 주 원내대표는 재공천된 이 위원을 상대로 무소속으로 출마해 승리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를 ‘자객 정치’로 규정하며 “자객들을 꽂는 의미는 ‘당신이 우리 당을 버리고 나가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견제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당내의 추가 탈당을 막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구경모 • 영남일보 기자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