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느티나무. 이 나무 앞에 서면 현자는 깨닫는다. 지치고 늙은 이 나무를 왜 오래 바라봐야 하는지. <사진=고규홍>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나무가 있다. 나무가 먼저 온갖 생물들이 살기 좋게 자리잡은 터에 뒤늦게 사람이 들어와 옹기종기 살아간다. 나무가 지은 열매를 양식을 먹고, 나무가 노동을 마치고 토해내는 숨결에 담긴 산소를 마시며 사람은 나무 곁에서 평화롭게 살아간다. 나무가 없다면 한 순간도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아서 사람살이의 무늬를 지킨다.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때로는 예기치 않던 재앙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게 사람살이의 운명이다. 사람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서 사람살이의 무늬를 지키는 건 나무다. 사람이 그린 무늬 즉 인문(人文)의 정수가 나무에 담기는 이유다.

무려 천삼백 년 전 쯤에 강원 지역에 세워진 법천사(法泉寺)라는 절집이 있다. 처음에는 법고사(法皐寺)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불법이 샘솟는 절집’이라는 향기로운 이름으로 바뀐 거찰(巨刹)이다. 사세(寺勢)가 융성하던 시기에는 강원 지역을 대표하는 큰 절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절집의 모든 전각은 남김없이 불에 타 스러졌다. 그게 끝이었다. 절집은 모든 흔적을 차츰 지워갔다. 당대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법천사는 마침내 폐사지(廢寺址)로 남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법천사 일대 터. 느티나무 홀로 살아남아 이곳이 절터임을 증거하고 있다. <사진=고규홍>

발굴작업이 한창인 이 법천사 터의 한가운데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느티나무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이 느껴진다. 켜켜이 쌓은 오랜 세월의 기록인 나이테가 남아있어야 할 줄기 안쪽은 썩어 텅 비었다.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 자리에 서서 들고나는 사람살이를 바라보며 그가 나이테와 함께 허공으로 날려 보낸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 것일까. 줄기 껍질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사람의 감각으로는 헤아릴 도리가 없다. 자신의 몸 안쪽을 텅 비워낸 채 살아야 했던 나무의 질긴 생명력이 안쓰럽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법천사가 융성하던 시절에 필경 절집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절집 터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자리잡은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큰법당 앞으로 펼쳐진 너른 마당 한켠에 우뚝 서 있던 나무였으리라.

분명하다. 나무는 법천사라는 법천사가 살아온 천년의 세월 동안 절집을 들고난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 사람살이를 품어 안고 살아왔다. 가만히 나무 앞에 서서 숨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면, 이 나무 그늘 아래에 들어서서 숨결을 나누었던 옛 사람의 살 냄새를 느낄 수 있으리라.

이제 나무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다. 나무는 천연기념물과 같은 문화재도 아니고, 보호수도 아니다. 보호수로 지정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싶을 만큼 나무는 지치고 늙었다. 심지어 나무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지조차 의심스러워 안타까움만 깊어진다. 수명을 마치고 창졸간에 쓰러질 수도 있다. 나무마저 이 절터에서 사라진다면, 그때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으로 사람의 향기를 탐색할 수 있을까.

사람 떠난 자리에 홀로 서서 사람의 자취를 지키며 고통스럽게 살아남은 한 그루의 나무가 참으로 장하고 고마울 수밖에 없다. 나무는 수천의 봄,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 이 땅에 다가오는 봄의 소리를 가만가만 탐색한다. 다시 또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땅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리고, 안간힘을 다해 새 잎을 돋워서, 햇살을 그러모아 양분을 지을 참이다.

원주 법천사에 얽힌 나무 이야기는 이어진다. 기록에는 법천사에서 향나무를 많이 심었고, 그 향나무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폐허가 된 절터에서 향나무는커녕 느티나무 외에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눈으로는 옛 사람살이의 흔적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너른 절터에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오래도록 그리움의 이름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사람이 가도 나무는 남는다. 나무에는 그와 더불어 살았던 사람살이의 무늬가 고스란히 남아있게 마련이다. 다만 나무가 사람의 언어로 옛 사람의 무늬를 전해주지 않을 뿐이다. 그가 오랜 세월 담아온 사람살이의 무늬를 짚어내고 읽어내는 건 바로 지금 나무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역사, 철학, 문학, 즉 인문학이 가야 할 한가운뎃자리에 나무가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사람살이의 무늬가 모두 사라졌음을 깨닫는 어리석음만큼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 곁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오래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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