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월요신문 임해원 기자]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던 중국의 민주화운동가 류샤오보(刘晓波)가 13일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류샤오보는 1955년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상산하향운동’에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 건축공사 근로자로 일하다, 1977년 지린대학 중문과에 입학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에서 중문학 석사, 문예학 박사과정을 이수한 뒤 강단 생활을 시작했다. 촉망받는 연구자였던 류샤오보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미국 하와이 대학 등에서 중국철학을 강의했다.

학자 시절,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비판해왔던 류샤오보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중이던 류샤오보는 시위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해 시위대에 합류했다. 허우더젠(侯德建), 가오신(高新), 저우둬(周舵)와 함께 ‘천안문 사군자’로 불렸던 류샤오보는 단식투쟁을 벌이며 평화적 시위를 이끌었고, 군의 진압이 시작된 6월 3일 군대와 협상하며 시위대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노력했다.

시위대를 이끌었던 주력 인사들이 당국의 처벌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는 사이, 류샤오보는 망명 제의를 거절하고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진압 이틀 뒤인 6일 ‘반혁명선동죄’로 체포돼 공직을 박탈당한 온 류샤오보는 이후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강단에서 내려온 뒤에도 단식투쟁과 집필활동을 통해 중국 인권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해온 류샤오보는 1995년 베이징 교외에 1년간 감금되었고, 1996년에는 ‘사회질서교란죄’로 3년간 노동교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2008년 ‘08 헌장’을 발표, 중국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류샤오보는 결국 2009년 ‘국가전복선동죄’로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랴오닝 성 진저우 시의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2010년에 중국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올해 5월 간암말기 판정을 받은 류샤오보는 6월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당국의 감시와 통제 속에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동안 숱한 망명제의를 뿌리쳐온 류샤오보는 아내 류사가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며 해외에서 치료받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새라 허커비 샌더스 미국 백악관 대변인 등이 류샤오보의 출국을 허용해줄 것을 중국 정부에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결국 13일 투병생활 중이던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류샤오보의 후반기 삶은 가혹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기나긴 수감생활과 정부의 엄격한 감시였다. 첫 번째 부인은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1996년 수용소에서 만난 두 번째 부인 류샤와도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했다. 2009년 수감된 이후로는 한 달에 한번뿐인 면회가 그들의 유일한 만남이었고, 마음을 담은 편지도 정부의 검열로 전해지지 못했다.

이 같은 고난에도 류샤오보는 증오를 품지 않았다. 2009년 재판 당시 그는 중국 정부의 가혹한 탄압에 대해 “나에게는 적도 없고 원한도 없다”며 법정 최후 진술문을 통해 대답했다. 이어 “원한은 한 사람의 지혜와 양식을 갉아먹고, 적 의식은 한 민족의 정신을 중독시킨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잔혹한 투쟁을 선동시키면 한 사회의 관용과 인성을 훼손시키고 한 나라의 자유 민주의 길에 장애가 된다. 나는 개인의 처지를 넘어서 나라 발전과 사회 변화를 보면서, 최대의 선의로 정권의 적의를 대하며, 사랑으로 원한을 녹이고 싶다”며 비폭력저항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표현했다.

류샤오보의 임종은 류샤를 비롯한 가족들이 함께 했다. 그는 혼자 남겨질 아내 류샤를 걱정하며 “당신은 잘 살아야 하오(好好活下去)”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한다. 류샤오보에게 ‘잘 산다’는 것은 단지 안락한 삶이 아닌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사회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의미한다. 그는 필생의 목표인 중국의 민주화를 끝내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을 멈출 힘은 없으며, 그렇기에 결국 중국은 인권이 존중되는 법치국가가 될 것”이라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저작권자 © 월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