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10구단 ‘들여다 보니’

[월요신문 이지현 기자] 2015년 3월 28일,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따스한 봄, 드디어 야구시즌이 찾아왔다. 올해는 KT 위즈의 가세로 10구단 체제가 꾸려지면서 경기수가 576경기에서 720경기로 144경기나 늘었다. 지난해 경기당 평균 관중인 1만1302명만 유치해도 올해 총 예상 관중은 813만7440명으로 8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82년 1월 15일 한국 프로야구 제1호 구단이 창단했다. 대전·충청을 연고지로 한 OB베어스(現 두산베어스)가 6개 구단 중 가장 발 빠르게 창단식을 거행한 것.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김영덕 감독, 김성근 투수코치, 이광환 타격코치로 한 코치진에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박철순, 실업야구의 홈런왕 김우열, 윤동균 등 선수 25명으로 구성됐다.

박철순, 강철원, 박상열, 선우대영, 계형철, 김현홍, 황태환(이상 투수), 김경문, 조범현, 정종현, 김진홍(이상 포수), 신경식, 구천서, 이근식(大), 양세종, 유지훤, 김광수, 박종호(이상 내야수), 윤동균, 이홍범, 김유동, 정혁진, 이근식(小), 구재서, 김우열(이상 외야수)
애초 OB가 연고지로 희망한 곳은 서울이었지만 이미 MBC가 선점한 상황이었다.

이에 프로야구 산파역을 맡은 이용일, 이호헌 등은 대전·충청을 프랜차이즈로 시작해서 3년 후에 서울로 이전할 것을 제의했다.

“두산그룹 사주의 거주지가 종로구였고 선대도 경기도 광주였다. 대전, 충청도와는 전혀 연고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을 강력하게 희망했는데 MBC 청룡으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에 3년 후 OB가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한다는 것을 KBO와 MBC를 포함한 각 구단이 공증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 과정을 모르는 이들은 OB가 충청도를 버리고 야반도주했다고 비난하지만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은 예정된 것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1년 11월부터 1997년 12월까지 두산 프런트로 잔뼈가 굵은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의 얘기다.

   
두산베어스의 마스코트 ‘철웅이’

“우린 처음부터 강했다”

시즌 전 대다수 야구 전문가는 OB의 전력을 중·하위권으로 예상했다. 다른 팀이라면 코치를 할 나이의 윤동균, 김우열 등 베테랑에 무명의 젊은 선수로 팀이 구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OB는 1982년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의 개막전에서 9-2로 승리를 거두며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마운드에서는 에이스 박철순이 2실점 완투했고 타선에서는 신경식, 양세종의 백투백홈런을 포함한 홈런 3개를 비롯해 장단 11안타를 치며 완승을 거뒀다. 5월 12일 1위에 오른 뒤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고 쾌속 질주한 끝에 29승 11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전기리그 18승 1패를 비롯해 이 해 22연승을 기록한 에이스 박철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의 경험과 강력한 속구에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며 상대 타자를 농락했다. 또한, 투타에서 신구조화를 이루며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끈기와 뚝심을 발휘했다.

이것은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잘 나타났다. 에이스 박철순이 허리부상으로 정상적인 등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맞이한 1차전에서 무명의 잠수함 투수 강철원이 9이닝 3실점 하는 호투를 펼쳤고 선우대영도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삼성의 삼두마차 권영호-황규봉-이선희를 상대로 숨 막히는 연장 15회 무승부를 펼친 것. 전력 열세 속에 뜻밖의 무승부를 기록한 OB 선수단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2차전 패배 후 3차전부터 4연승을 거두며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이와 관련, OB가 전문가 예상을 비웃으며 원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로는 선진적인 메리트시스템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일본 프로야구의 운영 방식에 정통한 박용민 단장은 잘한 선수에게 혜택을 주는 메리트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승리나 연승, 그날의 투타 성적에 따른 수당을 지급했다. 그때 007 가방에 항상 5백만 원 정도를 현금으로 들고 다녔는데, 경기가 끝나면 바로 100~150만 원 정도를 나눠줬다. 이걸 뒤늦게 다른 구단들도 알고 따라 했지만 그때는 이미 분위기를 뒤엎기에는 늦었다” 구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그리고 OB는 프로야구 정착을 위해 어린이 관중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어린이회원을 가장 먼저 도입하며 13만 명을 모집하는 등 각 초등학교 교실은 남색과 흰색, 주황색의 OB 모자와 잠바로 온통 도배됐다. 구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산베어스 엠블럼.

V2 기적, 그리고 믿음의 김인식 감독

감독의 역량에 따라 팀 성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나타난 것이 1995년 OB다. 감독 한 명 바뀌었을 뿐인데 전년도 7위였던 팀이 시즌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김인식 감독이 “4강은 노려볼 만하다”고 조심스럽게 출사표를 던졌을 때 다들 코웃음을 쳤다. 지난해 7위라는 성적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수단 이탈 사건으로 팀워크는 모래알처럼 흩어졌고 눈에 띄는 선수 보강도 없었다. 아무도 OB가 우승은커녕 4강 후보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프로야구 판도는 지난해와는 판이하게 흘러갔다. 시즌 초반 만년 하위권인 쌍방울과 OB가 선두를 다퉜다. 쌍방울이 한때의 바람으로 끝났지만 OB는 꾸준했다. 김 감독은 선수들 스스로 할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절대 무리하지 않으며 팀을 운영해나갔다.

시즌 종반인 8월 27일 1위 LG에 6경기 뒤진 2위에 머물렀다. 대다수 야구전문가는 “LG 우승은 확정적이고 OB는 2위 자리를 롯데에 내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역전 기회가 한 번은 온다”고 믿고 기다렸다. 그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12승 2패를 기록하며 9월 10일 선두에 올랐다. 이후 OB와 LG는 막판까지 숨 막히는 반게임 승부를 가려나갔다. 누가 1위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태평양과의 마지막 2연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OB는 우승을 위해 이겨야 했고 현대로 매각이 결정된 태평양은 홈에서의 고별경기라서 질 수가 없었다.

수원에서 벌어진 1차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남을 명투수전으로 전개됐다. OB 김상진과 태평양 정민태간의 에이스 대결은 9회 초까지 0의 행렬이 이어졌다. 김상진도 정민태도 온 힘을 다해 던졌다. 9회 초 OB는 안타로 출루한 김민호가 2루 도루를 성공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장원진이 적시 2루타를 치며 기나긴 0의 행렬에 마침표를 찍으며 1-0으로 승리. 2피안타 완봉승을 기록한 김상진은 한 시즌 최다 완봉승 타이기록(8개)을 세웠다. 기세가 오른 OB는 9월 27일 인천에서의 시즌 최종전도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3-2로 역전승을 거두며 ‘반 경기 차이’로 시즌 1위에 올랐다.

13년 만에 밟은 한국시리즈에서는 롯데를 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4승 3패로 물리치며 ‘V2’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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