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10구단 ‘들여다 보니’

[월요신문 이지현 기자] 2015년 3월 28일,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따스한 봄, 드디어 야구시즌이 찾아왔다. 올해는 KT 위즈의 가세로 10구단 체제가 꾸려지면서 경기수가 576경기에서 720경기로 144경기나 늘었다. 지난해 경기당 평균 관중인 1만1302명만 유치해도 올해 총 예상 관중은 813만7440명으로 800만 관중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롯데자이언츠 캐릭터. <롯데자이언츠 홈페이지 캡쳐>

부산의 열정, 롯데자이언츠 탄생

10구단 중 가장 열광적인 팬의 지지를 받는 구단이 롯데 자이언츠다.

사실 롯데가 처음 한국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5년. 그해동년 5월 6일 롯데그룹은 김동엽 전 공군 감독을 사령탑으로 한 10번째 실업야구팀이자 최초의 기업 야구팀인 롯데 자이언츠(이하 실업 롯데)를 창단한다고 발표했다. 실업 롯데는 실업야구단이 아닌 세미 프로에 가까웠다.

“공개 테스트로 신인을 발굴하고 여성 치어리더 응원단도 조직했다. 또 일본 가고시마에 전지훈련 가서 일본 롯데와 합동 연습을 하는 등 선진야구를 배웠다. 한국 야구에 수비 포메이션이 도입된 게 이때다. 완전한 프로 구단은 아니지만 실업야구 그 이상이었다. 프로야구를 준비한 것으로 보면 된다” 유남호 KBO 운영위원의 얘기다.

롯데는 실업야구에 참가한 1976년 하계리그 우승에 이어 추계리그도 제패하며 종합 우승을 거머쥐었다. 롯데의 출범과 성공에 자극 받아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등 기업 야구팀이 잇달아 창단하며 프로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 프로야구 창설에 동참해서 부산·경남을 연고지로 한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했다.

1982년 2월 12일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박영길 실업 롯데 감독을 사령탑으로 해서 김용희, 김용철, 노상수, 김성관 등을 주축으로 한 22명의 선수단으로 6개 구단 중 가장 늦게 창단식을 거행했다.

최동원에 울고 웃고 윤학길에 위안 삼다

시즌 전 대다수 전문가는 롯데를 중위권 전력으로 점쳤다. 마운드가 약하지만 김용희, 김용철, 박용성, 김성관, 김정수 등으로 구성된 타선은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화력을 자랑했다. 시즌 출발은 좋았다.

3월 28일 제과업계 라이벌인 해태에 상대로 14-2로 대승을 거둔 데 이어 OB(현 두산), 삼미를 잇따라 꺾으며 3연승을 내달렸다.

하지만 이후 승리보다 패배가 더 익숙해지며 전기리그를 5위(13승 27패)로 마감했다. 후기리그에서는 18승 22패로 해태와 공동 4위. 종합순위에서는 해태에 뒤진 5위에 머물렀다. 롯데로서는 최동원, 심재원, 유두열 등이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참가로 프로진출이 유보된 것이 뼈아팠다.

1983년에는 믿었던 최동원이 9승 16패로 부진하며 종합순위 꼴찌로 추락했다.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박영길 감독이 물러나고 강병철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추락을 피하지는 못했다.

한국야구의 에이스 최동원의 진가가 나타난 것은 1984년부터다. 이해 27승 13패 6세이브를 올렸다. 특히, 후기리그에서는 18승 6패 5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이 거둔 29승 중 23승을 책임졌다. 한국 프로야구사의 최대 오점인 져주기 경기로 성사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는 5경기에 등판해서 4승 1패를 올리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온 ‘공포의 1할 타자’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이듬해도 20승을 거둔 최동원은 1986년 OB와 치른 시즌 최종전에서 3-1로 앞서며 3년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9회 말 김형석에게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한 데 이어 신경식의 3루타와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주며 19승에 머물렀다.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철완을 자랑했다.

해태 선동열과의 맞대결도 인구에 회자한다.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첫 번째 맞대결에서는 0-1로 패했지만 그해 8월 19일에는 2-0 완봉승을 거두며 멋지게 설욕했다. 그리고 1987년 5월 16일에는 둘이서 연장 15회까지 던지며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신구(新舊) 에이스의 맞대결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사이좋게 1승 1무 1패를 나눠 가졌다.

1988년 11월 23일 프로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롯데와 삼성이 양 팀 에이스인 최동원과 김시진이 포함된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롯데에서는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으로 보내고 김시진, 오대석, 허규옥, 전용권을 받았다. 또 12월 21일에는 롯데 김용철, 이문한과 삼성 장효조, 장태수를 맞바꿨다.

삼성은 이해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現 한화이글스)에 3연패하며 포스트시즌 10연패라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에 시즌 종료 후 그룹 비서실 감사라는 전대미문의 고초를 겪으며 투수와 포수, 특히 대형투수를 확보해야 우승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반면, 롯데는 최동원과 매년 연봉을 놓고 진통을 겪었고 선수회 파동을 수습하기 위한 팀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팬들은 롯데의 상징과 같은 최동원의 트레이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것은 경기당 관중 수가 전년도와 비교해서 2266명이 줄어든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최동원이 사라진 롯데 마운드를 지킨 이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다. 1987년 첫 두 자릿수 승리(13)를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최동원이 연봉 싸움으로 이탈한 이듬해 18승 10패 3세이브를 올리며 일약 롯데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1989년에도 16승을 올리는 등 1997년까지 롯데 구단 최다승인 통산 117승을 거뒀다. 승수보다 더 대단한 것은 100완투(74 완투승)다. 롯데 마운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뒷문 불안이다. 1980년대 후반은 더 심했다. 그 시기 윤학길은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갈매기 다시 날다

1984년 우승 이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롯데는 1990년 11월 강병철 감독에게 다시 지휘봉을 맡겼다. 지난 3년간 빙그레 코치로 와신상담한 강 감독은 마무리 투수 부재 속에서도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켜 나갔다.

그 결과, 윤학길(17승), 박동희(14승), 김태형(11승), 김청수(10승) 등 4명의 10승 투수가 탄생했다. 타선에서는 기존의 장효조, 김민호, 김응국 등에 신인 박정태, 전준호가 가세하며 짜임새를 갖췄다. 시즌 4위로 7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 1무 2패로 무릎을 꿇었다.

1992년 롯데는 성적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마운드에서는 신인 염종석이 17승과 평균자책점 1위(2.33)에 오르는 대활약을 펼치며 롯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신인왕을 받았다.

타선에서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남두오성’(南斗五星)이 빛났다. 박정태(0.335), 김민호(0.322), 김응국(0.319), 이종운(0.314), 전준호(0.300) 등 다섯 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한 팀 타선은 8개팀 가운데 적은 팀 홈런(85개)에 머물렀지만 팀 타율 0.288(당시로는 역대 2위. 1위는 1987년 3할을 기록한 삼성)을 기록하며 상대 마운드를 무너뜨렸다. 시즌 3위로 진출한 포스트 시즌에서는 삼성과 해태, 그리고 빙그레를 잇따라 꺾으며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사직구장은 연일 인산인해. 1991년 역대 최초로 100만 관중(1,001,920명)을 돌파한 데 이어 1992년에는 120만 9천632명이 사직구장을 찾았다.

그러나 1993년에는 84만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1994년에는 더 떨어져서 63만여 명에 그쳤다. ‘V2’에 따른 충분한 대가를 원하는 선수들과의 연봉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우승 후유증을 제대로 앓으며 6위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팀 성적은 팬의 마음을 재는 온도계이며 관중 수로 나타나는 법. 1993년을 끝으로 두 번의 우승을 진두지휘한 강 감독이 물러나고 ‘미스터 올스타’ 김용희 감독이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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