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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위 사태로 본 중국-대만 갈등 70년 VS 남북 대치 72년 비교
   
▲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 사진은 논란이 된 대만 국기를 흔드는 장면이다. <사진제공=뉴시스>

[월요신문 허인회 기자] 쯔위 사태로 중국과 대만 간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쯔위 사태는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쯔위가 '마리텔'에서 대만 국기를 든 것이 논란이 되어 사과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알려진 후 대만 국민의 분노가 날로 커지고 있다. 오는 24일 쯔위 사건을 처음 폭로한 중국 가수 황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중국 네티즌들도 쯔위를 맹비난하는 등 양안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쯔위 사태는 중국 대만 간 70년 갈등의 역사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중국 대만의 양안 갈등은 분단 72년째인 남북 대치 상황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그 차이를 살펴봤다.

 

양안 갈등의 시작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의 관계를 논할 때 흔히 양안관계라 부른다. 이는 군사분계선 역할을 하게 된 타이완 해협을 두고 서안(대륙)과 동안(타이완)으로 마주보는 관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안관계는 중국과 대만에 각각 다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1945년 8월 대만이 연합국에 양도되자, 국민당은 국부군을 파견하여 대만을 접수했다. 이후 1949년 10월 베이징을 수도로 하는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고,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은 1949년 12월 대만으로 탈출했다.

 

제1·2차 대만해협 위기

국민당이 대만으로 옮겨간 뒤에도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주석과 장제스 국민당 총재는 적대적 관계였다. 중국은 무력에 의한 대만해방을 주장했고, 대만은 ‘3불(三不)정책’(접촉하지 않고, 협상하지 않으며, 대화하지 않는다)을 견지하면서 무력 사용 포기를 요구했다.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양안간의 크고 작은 군사적 대립과 긴장은 계속됐다. 지금까지 3차례 대만해협 위기 중 2차례가 바로 이 기간에 발생했다.

제1차 대만해협 위기는 1954년에 일어났다. 미국과 대만의 군사조약 체결에 반대한 중국정부는 미·대만 간 방어조약 체결 논의가 본격화되자, 그해 9월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진먼(金門)섬에 포격을 가한 것.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미국의 안보부담을 덜기 위해 장제스에게 진먼(金門)섬와 마쭈(馬祖)섬 포기를 권유했지만 거부당했다. 진먼 섬은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하며 최후의 보루로 방어했던 곳이어서 장제스는 결사적으로 양도를 반대했다. 결국 그해 12월 미국은 대만과 ‘공동방어조약’을 체결하며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3년 후, 제2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한다. 1957년 들어 미국이 대만에 미사일을 배치하자 중국은 진먼 섬를 포격하여 대만해협에 긴장을 고조시킨 것.

제2차 대만해협 위기는 미국의 전술핵무기 배치를 우려한 중국 정부의 무력도발이었지만 일각에서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으로 야기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2차례의 큰 위기 뒤에도 양안간 국지전 형태의 군사적 충돌은 계속됐다. 그러다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의 방중으로 양안관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미·중 관계 정상화의 일환으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개 성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 이후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중국정부의 ‘대만과 단교, 미군 철수, 방위조약 폐기’등 수교 전제조건을 받아들여 1979년 1월 미·중 수교가 이뤄진다. 미중 수교 직후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 섬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을 발표하면서 충돌은 막을 내렸다. 이후 40년 가까이 양안간 군사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일국양제와 92공식

미·중 수교 후 양안관계는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양안관계가 대치국면을 벗어나 교류 협력의 물꼬를 튼 것. 중국은 기존의 무력해방정책을 ‘평화통일’ 노선으로 변경하고, 경제, 문화, 체육,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를 제의했다. 또한 1981년 대만에게 자치권(자본주의 유지, 군대유지 등)을 부여하는 평화통일 9개 방안과 1982년 일국양제(一國兩制)에 의한 통일 방식을 제안했다.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 안에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공존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홍콩통치원칙과 유사하다.

대만 역시 폐쇄적 대륙정책이 한계에 부딪히자 친척 방문 허용 등 인적 교류를 통한 다각적인 양안 간 교류·협력을 추진하였다.

90년대 이르러 양안은 진전된 합의를 하게 된다. 1992년 11월 민간기구인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가 홍콩에서 회담을 갖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중화민국(대만)이 각자의 해석에 따른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것. 이른바 92공식이다. 92공식은 지금까지 중국과 대만 양안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용어가 됐다.

 

제3차 대만해협 위기

이후 양안관계는 리덩후이 총통의 등장으로 다시 갈등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리덩후이 총재가 1995년 방미 때 “대만은 중국과는 다른 독립민주국가”라고 발언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이후에도 리덩후이의 탈중국화 시도가 심해지자 중국은 강경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1996년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 후보는 대만 독립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를 경계한 중국에 의해 제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중국은 대만해협을 향해 탄도 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는 등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이에 미국도 니미츠호와 인디펜던스호 등 2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대만해협에 파견해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먼저 물러난 쪽은 중국이었다.

군사전문가들은 당시의 대치가 중국의 군사전략을 바꾼 계기가 됐다고 분석한다. 이전까지 중국은 방어가 취약한 항모전단 대신 적은 비용에 효율적인 잠수함대에 비중을 뒀다. 하지만 제3차 대만해협 위기를 통해 항모전단의 위력을 확인하면서 항모 보유로 전략을 수정했고, 그 결과물이 2012년 취역한 중국 최초의 항모 ‘랴오닝’함이라는 분석이다.

 

한반도 상황, 양안관계와 유사

양안관계와 남북관계는 유사점이 많다. 갈라진 시기도 1945년~1950년 사이로 비슷하고, 미국과 얽혀있는 특수한 관계도 그렇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경제상황 역시 남한이 북한을 역전한 것처럼 중국이 대만을 추월했다. 하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제2차 대만해협 위기 당시 중국 공산당은 2달 남짓 동안 대만의 최전방인 진먼 섬에 47만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병력을 진군시키지는 않았다.

한반도 상황은 다르다. 북한은 포격전 외에도 특수부대를 투입시키는 등 끊임없이 도발해왔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31명이 청와대 기습 임무를 띠고 침투한 것. 이들은 교전 끝에 28명이 사살되고 2명은 도주, 1명은 생포됐다.

같은 해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은 120여명에 달하는 북한 특수부대 병력이 출몰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도발로 2개월에 걸쳐 게릴라전이 전개됐다. 전투 결과 113명 사살에 7명을 생포했다. 아군의 피해도 심해 민간인 포함 40명이 사망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9월 북한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시 부근에서 좌초된 후 잠수함에 탑승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26명이 강릉 일대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에 아군은 대대적 소탕작전에 나섰다. 49일에 걸친 소탕작전 끝에 무장공비는 승조원 1명 생포 외에 전원 사살됐으며 아군의 피해는 군인 12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 민간인 4명 사망했다.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도 도발은 이어졌다. 1999년 발생한 연평해전은 한국전쟁 이후 첫 남북 해군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2002년 발생한 제2연평해전 때는 아군 사망 6명, 부상자는 18명이었다.

2010년 11월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해병대원 2명, 민간인 2명이 사망하는 등 인명 피해가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은 북한이 휴전 이후 남한의 영토에 직접 포탄을 발사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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